(23강) 베드로전서 4:1-6  육체의 남은 때

 

<본문>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베드로전서 4:1-6)



<설교>

 신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 받기 전과는 분명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을 성령 받은 자로 간주한다면 성령 받기 전의 모습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행동이 좀 더 윤리적으로 변했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오심이 신자를 지극히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신자가 달라지는 것은 세상에서의 자신을 나그네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그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결코 우리의 뜻대로 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을 받으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즉 육체가 잘되는 것과는 전혀 반대된 길을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육체가 잘되는 것이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이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됩니다.


사람의 정욕은 항상 육체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가 세상 속에서 가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정욕으로 살아가기에 십자가로부터는 그 마음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그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주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즉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나는 죽고 주님이 사시는 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시는 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내 안에 사심으로써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 되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정욕을 따라 살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신자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삶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언급하면서 내 뜻이 이루어지고 육신이 잘되는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내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3절에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말하는 것은,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 우상숭배와 같은 것은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열매들이며, 성령 받지 못한 자가 주인 되신 주님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지 않을 때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 받은 자로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로 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자로 살아가는 지금 그러한 것은 모두 지나간 때의 모습으로 끝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신자를 이방인의 뜻을 좇아 사는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길로만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신자를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육신을 향한 우리의 뜻을 포기 하게 하시고 주님이 가신 길에 순종하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난은 신자를 신자답게 만들어 가는 필수 과정이며, 그러므로 신자에게 고난이 그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내버려두신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기 뜻을 고집하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 받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멀리 계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포기 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육체의 남은 때를 관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관리하셔서 육체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강건한 영혼으로 만드시기 위해 날마다 일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자신의 뜻을 위해 살던 때는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모습이 세상이 볼 때는 납득할 수 없고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과 같은 길을 가지 않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길을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러한 신자를 비방합니다. 만약 신자가 이방인의 뜻을 좇아 살던 때에 갔던 길을 여전히 간다면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신자로서 합당한 길을 가지 않은 결과일 뿐입니다.


세상이 가는 길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자신의 뜻을 좇아 사는 길의 마지막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한 길에 소망을 두고 또 다시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의 번성과 풍요로움으로 그 인생 전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풍요와 번성을 누린다고 해도 그 기간은 극히 짧은 한시적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원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세상의 참된 현실입니다. 신자는 이 참된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육체를 심판합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살게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은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남은 때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만이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