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베드로전서 4:7-11  마지막 때가 가까운 때에

 

<본문>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베드로전서 4:7-11)



<설교>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용서를 받고 주님의 은혜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삶도 새로운 삶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새로운 삶이 곧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내 정욕을 좇아 살던 삶은 성령 받기 전의 것으로 그치고, 이제는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게 된 새로운 자로서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절)라는 말을 합니다. 즉 신자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할 근거, 이유가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마지막 때의 가까움을 보지 않고 사는 자들에게는 정신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알았을 때 왜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라면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정욕을 따라 살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습성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과는 반대의 길이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이 곧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잊고 살면 기도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정욕을 따라 하게 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도 없게 됩니다. 다만 자신의 정욕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이 어떤 현실에 처해있는가를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그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다만 보이는 세상에 모든 의미를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남들처럼 웃고, 나쁜 일이 있으면 울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이루면 우리가 울고 웃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지금 미리 바라보며 사는 것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마지막 때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갈 때 증거되는 삶의 내용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이 정욕을 좇아 살 때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 우상숭배, 이 모든 것이 이방인의 뜻을 좇아 자기 정욕대로 사는 흔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면 사람의 정욕에서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열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의 사랑으로 열심히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에는 우리의 사랑, 즉 인간적인 사랑이 있는 반면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의 한없는 사랑 앞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사랑은 사랑도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소망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신자가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서로 나타내고 증거하는 일에 힘쓰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주님께 받은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된 것입니다. 우리의 악한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신 그 사랑으로 서로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신자의 사랑입니다. 결국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자신의 말고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향한 용서와 허물을 덮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가 확인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그 사랑에 깊이 빠져 들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하여 열심히 사랑하는 길을 가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9절을 보면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라고 합니다. 대접을 하는데 왜 원망이 나오게 될까요? 원망은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으면서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할 때  발생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환경과 형편에 있지 못합니다. 나은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면 풍족하게 대접할 수 있고, 못한 환경에 있다면 그보다 못한 대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존심일 뿐입니다. 그 자존심이 원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말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관계가 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러한 말씀을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받은 분량만큼 봉사할 것을 말합니다. 적게 주고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것만큼 봉사한다면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적게 받은 것으로 원망할 이유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았다고 해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봉사하는 자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한 것이기에 어떤 봉사를 해도 그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봉사의 정신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자신을 위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한다면 결국 내 힘으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