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베드로전서 4:12-19  고난 받는 자의 복

 

<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베드로전서 4:12-19)



<설교>

12,1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상식에 도무지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유는 자신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너희를 시련하려고 하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에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회피대상 1호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인데 과연 누가 고난으로 즐거워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바로 신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14절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복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하십니까?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고난이든 욕을 받는 것이든 세상은 결코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모든 욕이 복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이 복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연단하기 위해 불시험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대개 연단이라는 말에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연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이 강해지는 것을 내가 강한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주님만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사랑하는 신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신자를 연단하시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주님만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이나 시련의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께 더욱 마음을 두게 되는 믿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단의 의미입니다.


때문에 주님만 사랑하기를 원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13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시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되는 것으로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을 누가 원하고 이해하겠습니까?


신자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며 산다고 해서 세상이 그것을 알아주고 높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을 베푸셨고, 자신의 생명으로 죄인들을 대접하셨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봉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을 세상은 핍박하고 죽이는 것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대접받기를 원하고,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그 마음에 주님을 두지 않고 있는 흔적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되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난이 즐거움이 되려면, 고난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영광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마지막은 하늘의 영광 보좌였습니다. 즉 하늘의 영광에 참예될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에 참예된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고 해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시고 영광으로 들어가셨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참예되는 것만이 하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영광에 참예되기를 원하십니까? 영광의 면류관을 소원하십니까?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에 참예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에 되는 것을 싫어할 리 없습니다. 오히려 즐거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예수를 말할 뿐, 예수님의 영광도 고난도 생명에도 관심이 멀어진 채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 채 살아가기 때문에 고난도 시련도 벗어날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높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높일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았던 사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그들 모두 하나같이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사도들이 그 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서 욕을 먹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16절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 것이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에 대해 17,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왜 심판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신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심판이 시작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알곡이 있는 반면에 가라지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가라지를 추수 때에 심판하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심판이 시작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있는 쭉정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것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냐는 의미로 하시는 말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신자를 욕하고 조롱을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함을 알고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신자를 구원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열심과 의지로 일하시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를 붙드시고 다스리시며 고난과 시련으로 이끌어 가시면서 고치심으로 얻어지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경건치 않은 자들은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일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