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베드로전서 5:1-4  고난의 증인

 

<본문>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 5:1-4)



<설교>

1절을 보면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는 말을 합니다. 성경에서 장로에 대해 말할 때마다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는 지금 한국교회가 취하고 있는 장로제도에서의 장로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장로에 대한 내용은 교회에서의 장로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알게 해줍니다. 목사든 장로든 중요한 것은 그 역할에 대한 이해입니다. 즉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고 역할에 헌신하는 것이 목사다운 것이고 장로다운 것인데, 대개 역할은 무시한 채 오직 목사라는 직책과 장로라는 직책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폐단입니다.


장로와 목사가 교회의 어른이라는 생각으로 교회의 모든 일은 당회가 결정하고 교인들은 당회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하면 된다는 것이야 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목사 장로의 역할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 장로는 하나의 역할일 뿐, 교회에서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장로는 목사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2절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라는 말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회의 의미가 담긴 말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목회’는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용어로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도 장로도 모두 교회의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세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면서 장로와 함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일할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때문에 양 무리를 치는 것이 꼭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목사와 장로가 함께 교회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역할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와 장로는 동일하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이런 정신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폐단들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목사는 자신이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는 것으로 목사의 권세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권세는 말씀에 있는 것이지 목사에게 권세가 별도로 부여된 것은 없습니다. 즉 목사는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다른 권세를 부여 받은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특별한 권세를 부여 받은 것으로 여긴다면, 말씀을 전하는 목사 스스로 말씀의 권세를 부인하는 결과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어떤 경우에서든 높고 낮음의 권세 다툼이 발생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위에 참된 권세자가 계시고 우리의 주인이 계시고 교회의 머리되신 분이 계신다는 묵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누구든 상관없이 모든 신자는 교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한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를 하나님의 양무리라고 말하는 것은 양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목사는 다만 양을 맡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내 양이라는 인식이 없어야 합니다. 내 양이 없기에 당연히 내 교회도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교회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가장 먼저 떨쳐 버려야 할 생각은 내교회, 내교인이라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내 교인을 지키고 단속하고 끌어 모으는데 모든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로는 목사가 참된 진리를 전하는가 살피고 돕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양무리가 다른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았는지 살피면서 하나님의 양들이 영적으로 강건하게 자라가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이런 관계로 맺어진 것입니다.


1절에서 장로를 고난의 증인으로  말합니다. 고난의 증인은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감으로써 주님을 증거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목사와 장로가 가야할 길은 고난인 것이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높아지는 길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 장로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믿음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고생을 뜻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고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까?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단지 돈이 없어서 겪는 삶의 고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증거하심으로써 받으신 고난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난의 증인이라는 것은 세상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전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갈 자로 부름 받은 것이 곧 고난에 참예된 것입니다.


1절 뒤에 보면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목사와 장로의 일을 함으로써 영광을 받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증인으로서 주님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주어진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고난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려서 고난의 증인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즉 말씀이 사도를 고난의 길로 밀어 붙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교회에 말함으로써 장로가 가야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즉 장로가 가야 하는 길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길도 아니고, 자신의 유익을 얻는 길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증거되기 위해 살아가는 고난의 증인의 길임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증인의 길을 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올해는 좀 나아질까?’라는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올해의 경제가 나아지든 힘들어 지든 신자에게 바뀌지 않는 것은 언제가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경제와 상관이 없는 길이라면 신자 역시 삶의 방향을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데 두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장로는 양 무리를 치는 일을 부득이 함으로 하지 않고 자원함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않고 즐거운 뜻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자원함과 즐거움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의 길을 가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3절에서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하는 것처럼, 목사의 권세를 주장하며 양 무리를 주장하려고 하지도 않게 됩니다. 주장하는 자세는 나는 높고 너는 낮다는 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도 장로도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자라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결국 양 무리의 본이 되는 것보다는 주장하는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신자는 섬기는 자일 뿐 섬김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갈 자일 뿐, 누군가를 다스릴 권세는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이처럼 섬김의 길을 가게 됨으로써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