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베드로전서 5:5-11  겸손하라

 

<본문>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베드로전서 5:5-11)

 


<설교>

베드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자신도 함께 장로된 자라고 하면서 고난의 증인이라고 하고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교회에서의 장로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하는 것이지 어른이라는 것으로 맡기운 양무리를 주장하거나 다스릴 권세가 주어진 직무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로를 그러한 권세로 이해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무지한 결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어서 젊은 자들에게 권면합니다. 하지만 젊은 자라고 해서 굳이 연령적으로 젊은 청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장로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로를 어른으로 본다면 장로를 제외한 신자는 상대적으로 젊은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젊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장로에게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작정 장로는 어른이니까 어른 말을 들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는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이 라는 말을 하는 것은 사도가 장로들에게 권면한 것과 같은 취지에서 젊은 자들에게 권면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장로는 하나님이 맡기운 양무리들에게 주님의 고난을 증거하기 위해 세움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장로가 고난의 증인의 길을 갈 때 양무리는 장로에게서 주님의 고난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주님의 고난에 참예할 때 그것을 장로들에게 순복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교회의 모든 신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중심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정신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장로는 주님의 고난을 증거하고, 신자는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정신을 따르는 것으로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이 길을 외면하고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증거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가 주님을 증거하려면 낮아진 자리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신 그분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진짜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 믿으라’는 말 한마디로 주님이 증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의 모임인 교회는 고난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의 부흥에 모든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과연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부흥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부흥에 매이지 않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잘먹고 잘살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잘먹고 잘사는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아닌 다른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찾습니다. 이처럼 다른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고난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만 말하지 말고 희망이 될 수 있는 긍정적인 말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내 귀에 즐거운 말만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주님이 홀로가신 것으로 만족하고 자신은 주님의 능력으로 이로움을 얻기를 원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존재하시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인생은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잘되면 잘되는 일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이고 안되면 안되는 일에서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의 인생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비록 세상의 눈에는 실패로 보인다고 해도 신자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실패는 없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은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주어질 영광에 참예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성공인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면서 주님이 증거되기를 원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합니다.


서로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관계에서 있어야 할 것을 뜻합니다. 즉 신자는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나타내고 증거하는 관계로 맺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서로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관계이고 교회인데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항상 엉뚱한 것을 보려고만 합니다. 또한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받고 잘된 자신을 증거함으로써 그것을 자기 자존심으로 우월감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서로에게서 상대방의 자식을 보게 되고, 사는 집을 보게 되고, 입는 옷을 보게 되고,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썩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게 경쟁하고 비교하고 상대방보다 못하고 초라하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는 겸손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결코 서로를 높일 수 없고 형제의 관계로 하나 됨을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6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는 것은, 신자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이루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염려할 것이 없게 합니다. 내 뜻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신 대로 살면 되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힘든 길로 인도하시면, 그 길에서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되심을 증거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항상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꿈꾸며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내가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염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내 인생이 잘되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같이 살아가는 것처럼, 마귀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마귀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마귀에 대해 경계하지 않고 싸움이 없이 다만 교회생활에 충실하면 신앙의 삶이 다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사도가 보는 현실은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모든 형제가 동일한 고난의 길을 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풍족하게 산다고 해서 그가 고난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풍족하다고 해도 자신의 풍족을 바라보지 않으며 세상이 거부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길에 순종한다면 누구도 고난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만, 믿음은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10,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길에서 누릴 신자의 영광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진리며, 이 진리 때문에 하나된 것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