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베드로전서 5:12-14  은혜에 굳게 서라

 

<본문>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베드로전서 5:12-14)



<설교>

베드로는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12절)는 권면으로 서신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인사말을 보면, 지금까지 사도가 증거했던 것은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껏 증거한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굳게 서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껏 베드로전서를 살피면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해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를 마치는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껏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가를 들었으면서도 사도가 증거했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결국 사도의 권면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전서를 마치면서 사도가 증거했던 은혜가 무엇인가를 정리해보고 그 은혜에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1:1-2절에서 사도가 신자에 대해 말했던 것은 흩어진 나그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은 핍박으로 인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생활했습니다. 그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환난과 핍박과 고통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사도가 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대개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에게 은혜는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은혜를 구합니다. 가장 필요한 것이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전혀 다른 은혜를 말합니다.


1:2절을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도에게 있어서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고,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물론 누구든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통이 없이 편안한 환경 속에서는 얼마든지 은혜라고 할 수 있지만, 고통의 환경에서도 과연 그럴 수 있겠습니까?


환난으로 인해 고통스러운데, 삶이 힘들고 피곤한데, 하나님이 나를 미리 아셨다는 것, 택하셨다는 것,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참된 은혜로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미리 아셨다고 해서, 택하셨다고 해서, 고통과 환난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대로 계속되고 있는 환경 속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처한 환경과 형편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로 다가오게 되었는가를 바라볼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환난과 고통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환경과 형편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먼저 토해 놓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할 자가 바로 나 자신임을 바라보게 된다면 나에게 주어진 환난과 고통도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이 죽은 자리에 처한 나를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택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참된 은혜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1: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찬송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임을 말합니다. 우리를 복주셔서 세상에서 잘살게 하는 일이 아니라,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찬송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에게 소망은 썩어질 것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듭난 신자에게는 산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신 산 소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산 소망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소망을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산 소망이 주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그 소망을 잘 지키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날마다 세상의 유혹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자를 시련과 고난으로 이끌어 가심으로써 산 소망에 견고하게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환난에서 잠깐 근심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은혜의 내용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환경과 형편에 따라서 믿음이 변하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의 내용을 하나님의 행하심에 두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참된 은혜를 안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가져오실 온전한 은혜를 바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맛본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주의 인자하심을 사모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로 감사하고 인자를 사모하는 자로 살기 때문에 세상의 제도에게 순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함께 생명의 유업을 받을 자로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이런 마음이 형제들에게도 나타난 바가 되어져서 마음을 같이 하고 체휼하며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산 소망이 있고 주님을 사모하는 자로서 가야할 길임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교회의 장로는 고난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맡기운 양들을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가 증거할 것은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젊은 자는 장로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로는 고난의 길에 서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훼방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을 은혜 위에 굳게 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마음을 흔드는 자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며 은혜임을 알고 은혜 위에 굳게 서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모이는 것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진리만 가득차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