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베드로후서 1:3-4  큰 약속

 

<본문>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3-4)



<설교>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에 거한다면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2절)는 말을 함으로써 은혜와 평강이 믿는 자에게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양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은혜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풍성한 은혜 역시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풍성히 앎으로 나타나는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은혜와 평강의 풍성함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자신의 열심과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참석함으로써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려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앎이 없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감정이나 분위기에 치우친 결과일 경우가 농후하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도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문제를 소홀히 생각하며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자신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잘 안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성령의 깨달음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알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를 날마다 새롭고 풍성한 은혜와 평강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이런 내용들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동적인 면, 즉 몸으로 활동하고 체험하는 것이 아니기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보게 되는 것이지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신자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자 하기 전에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3절을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람의 인적사항을 아는 것처럼 신에 대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듯을 알게 된다면 신자는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을 아는 앎의 능력에 의해서 흔들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알게 됨으로써 피조물이며 경건치 못하고 불의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총으로 다가오셨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앎이 신자를 더욱 많은 은혜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만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을 은혜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아무리 믿음을 말한들 그 믿음은 속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받은 자로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를 더욱 많이 새롭게 바라보기를 소원하는 신자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고난과 핍박에 있는 신자들에게 신자라는 존재가 주어진 환경을 초월해서 어떤 은혜에 있는 사람인가를 말함으로써 환경을 초월해서 은혜를 더욱 많이 누리는 신자로 굳게 서기를 원해서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존재하는 신자가 가야할 길이 고난의 길임을 언급하였다면, 베드로후서에서는 고난의 길에서도 더욱 많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이 신자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는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해도 결국 주신 것으로 인해 은혜와 평강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주셨는데, 왜 받은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까? 그 이유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을 앎으로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현대 교회가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신자들을 마치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잘 알고 믿음도 있는데, 다만 열심히 없고 힘쓰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신자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신자로서 더욱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입니까? 성경읽기입니까? 물론 그러한 것을 힘쓰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이 부족해서 자신의 신앙이 연약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4절을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또 다시 새롭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시고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 약속 안에서 우리를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여러분께는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앎이 여러분을 굳게 붙들며 은혜와 평강에 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