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베드로후서 1:4-9  잊지 말아야 할 것

 

<본문>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4-9)



<설교>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신의 참예한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를 힘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신의 성품에 참예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은 사람들에게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들의 힘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면, 신자에게서 맺어져야 할 것은 당연히 신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마 17:20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열매로서 우리가 붙어 있는 나무가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성품에 참예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은 가지임을 뜻하는 것이고, 따라서 가지에게서 맺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 즉 신의 성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5-7절에서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으로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개 관심을 두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흔히 믿음의 덕목이라고 일컫는 이 7가지 열매들을 맺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가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열매를 맺기를 힘쓰라고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신자가 믿음의 덕목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덕을 세우고 싶어 하고, 인내하고 경건하며 형제 우애와 사랑 등을 실천하고 그러한 열매를 맺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신자만 아니라 신자아닌 사람들도 기본적인 양심에 의해서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결국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하고자 해도 안된다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덕목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라고만 강조한다면, 그러한 말을 듣는 순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천하자’고 다짐한다고 해도, 결국 돌아서면 또 다시 원래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현상만 반복될 뿐입니다


본문에서 중점은 믿음의 덕복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8,9절의 내용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앞에서 말한 믿음의 열매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믿음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 때문에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 말미암아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음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어서 멀리 보지를 못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는 일에 게을러서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세상 것에 마음이 취해서, 멀리 보지를 못하고 우리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 구원을 받았는가를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신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신이 행했던 모든 것들이 허공을 치는 헛된 것들이었으며 향방 없이 무작정 달렸던 것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참으로 귀한 것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을 알기 전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헛된 삶을 더욱 든든히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런 믿음에서 어떻게 본문에서 말하는 신의 성품들이 맺어질 수 있겠습니다. 오직 자신의 욕망에 의한 육의 열매만 잔뜩 맺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착각하면서 좋아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열매들은 신의 성품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있는 성품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품들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 이 모두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열매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앎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매들이 없다면 그것은 힘쓰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엡 3:17-19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아십니까?


사실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도 해도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즉 사랑의 분량이 어떻다는 것을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또 자식도 부모를 사랑하지만 부모의 사랑의 분량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집어넣었다고 해서 당장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조금씩 자신의 삶에서 배우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죽을 때까지 사랑을 알아가고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나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즉 다른 말로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자비로 살아가는 자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믿음의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힘써야 하는 것은, 나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 때문임을 잊지 않고 모든 삶에서 겸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눈앞의 세상만 보게 되면 결국 나의 죄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주는 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욕망에 눈이 가려서 참된 복과 진실로 귀한 보배를 보지 못하고 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믿음의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지 않아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힘들어지고 고통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며 믿음의 열매가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나 개인이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엡 3:8-9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