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베드로후서 1:10-11  부르심과  택하심

 

<본문>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베드로후서 1:10-11)



<설교>

베드로 사도는 4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약속으로 말미암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를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나타내셨던 성품들을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부르심과 택하심을 입은 신자들을 세워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맺어야 할 열매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어떤 존재로 세상에 세우고자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며, 우리를 그 피로 말미암아 부르신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일에 취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믿음의 열매 또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의 열매가 없는 이유를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십자가 은혜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 더 마음을 두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의 말은 지금 내게 주어진 어떤 문제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신자들만이 관심 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주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미 멀리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 소경과 같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고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러한 은혜를 베푸신 것은 우리를 부르신 분의 영광과 덕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부르신 분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심령에 더욱 분명한 사실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질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되며 세상의 썩어질 것으로부터 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신자의 삶은 게으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면서 하나님이 부르신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깨끗해졌다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존재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취해서 십자가의 은혜조차 잊어버린 자로 살아가기에 아무리 스스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그 믿음에는 아무 열매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굳게 함으로써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당하는 신자들에게 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시험과 환난을 겪는 신자에게 권면을 한다면 시험과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는 권면을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한다면 시험과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의 목적이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주기 위함이 아님을 알기에 시험과 환난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시험과 환난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 등의 열매들로 나타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이고 이런 믿음에 있는 신자는 어떤 시험과 환난에서도 실족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장 흔들리기 쉬운 것은 환난과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하다가도 환난과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안락한 삶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자신의 구원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인하기  때문에 만족할만한 열심이 없다면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스스로 미심쩍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지 못하고 실족하는 모습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요 15:16-19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운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과실을 많이 맺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원시치 못해서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기에 믿음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조차 나타낼 수 없는 빈약한 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길을 가게 하십니다. 이왕이면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길을 가게 하지 않고 왜 굳이 미움 받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무도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미움 받는 것을 통해서 세상의 죄를 드러내시고 세상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이었음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신자는 세상의 정욕으로부터 피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써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롬 8:38-39절을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있기 때문에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그 어떤 피조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무엇에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무효케 할 능력이 없다는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넉넉하게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고 생명을 향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