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베드로후서 1:12-15  생각해야 할 것

 

<본문>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베드로후서 1:12-15)



<설교>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망각입니다. 뭐든 쉽게 잊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잊기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의 어떤 일이 기억에 남아서 그 일을 교훈 삼아 오늘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일을 겪게 하시고,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 고쳐 가시는데, 정작 사람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잊어버림으로써 항상 예전의 수준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분명 신앙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마음에 닿고 은혜가 되면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다짐이 여러분께 한두 번 있는 일이겠습니까? 10년 20년 설교를 들으면서 수없이 반복된 경험이고 다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앙은 예전의 수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이유는 자신이 깨닫게 된 것, 은혜가 된 것,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음도 다짐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단지 말씀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은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에서 깨닫게 된 진리가 나의 소원이 되어서 내가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을 이해하고 다짐하는 것으로 말씀을 잘 들은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깨닫게 된 내용이 진심으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 소원하지 않는 깨달음, 다짐은 결국 즉흥적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깨닫고 수없이 다짐하고 하면서도, 결국 신앙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2,13절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앞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10,11절)는 말을 합니다.


사도의 말은 분명 진리입니다. 여러분도 사도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음을 믿을 것이고, 이 택하심과 부르심이 우리를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도 믿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도 사도가 증거한 모든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진리를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과 진리로 살아가는 것을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안다고 해서 진리로 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 신자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못하겠다는 신자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알고 있고 믿는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내가 믿는 십자가가 나를 이끌어 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제 우리의 삶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던가요? 이처럼 신자가 믿는 진리가 삶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 안다고도 할 수 없고 믿는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알고 십자가도 믿지만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도 십자가도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머리에는 예수님이 계시지만, 마음에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결국 말은 이방인과 다른데 삶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같은 방향으로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말하면서 진리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흥미있는 내용이나 알지 못한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한 진리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교회로 모여서 흥미를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반복해서 확증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단지 반복적인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잊고 사는가를 돌아보면서 자신을 칠 수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에 끌려가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향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영생보다는 교회 일을 통해 신앙의 만족을 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경향이 이럴수록 교회는 아무리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오직 십자가의 길과 영생만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신자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신자가 항상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잊어버리기에 영생과 진리에서 멀어진 채 살아가는 것일까요?


13-15절을 보면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장막은 ‘육신’을 뜻합니다. 육신은 언젠가는 벗어버릴 껍데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잠시 머물기 위해 지은 장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사도는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사람은 누구나 육신이라는 장막을 벗어버릴 때가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 즉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닥칠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인간은 죽는다’는 불변의 이치에서 바라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것은 11절의 내용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죽으면 천국 간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천국가기 위해서 반드시 육신의 장막을 벗는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천국대로 말하고, 세상은 세상대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돌려 버립니다. 인간이 성공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기울이고 또한 성공했다고 해도 죽음은 그 성공도 의미 없는 것으로 평가해 버립니다. 죽은 자에게 세상에서의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고 창고에 가득 쌓아둔 재물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행복을 꿈꾸는 그 모든 것도 어리석은 것으로 선언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오늘 죽는다면 그 모든 것도 내 것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죽음을 생각한다면, 인간에게 가장 헛되지 않는 것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굳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잊은 채 살기 때문에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마음과 소원에는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이 자리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님이 그 삶에서 증거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귀한 분이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세워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귀하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죽음의 때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지지만 그 때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일지 내일일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잘 알 것입니다. 영원한 사망과 생명으로 구별되는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세상에서의 고통과 어려움과는 비할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곳이 영원한 사망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처한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그리스도는 사망에 처했던 나에게 귀한 분입니다. 이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