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베드로후서 1:16-18  사도의 증거

 

<본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베드로후서 1:16-18)



<설교>

여러분은 무엇이 신앙생활을 어렵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들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서 신앙생활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편이 좋은 사람은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없을까요? 사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형편의 좋고 나쁨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형편의 좋고 나쁨도 영향이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빙자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교사입니다.


거짓교사들의 말은 언제나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합니다. 사람들의 욕망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항상 사람들의 본성과 상충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어서 쉽게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조금 마음이 끌리는 듯하다가도 거짓교사의 말을 대하면 또 다시 그쪽으로 마음을 뺏기기 일쑤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가 전한 복음에 대해 의심하고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 사도 자신이 친히 본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인간은 누구나 이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다가 장막을 떠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잘살고 못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막을 떠나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의 말은 신자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약속이 있기에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는 확고한 소망이 아니라 한낱 기대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하나님은 신자가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된다’는 말을 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흡족하게 해주는 말은 어느 것일까요? 분명 현실의 문제에 함께 도와주시는 하나님에게 마음이 갈 것이고, 그 하나님을 믿고자 할 것입니다. 거짓 교사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에게서 듣는 복음과 다른 곳에서 듣는 복음이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십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맞다고 여겨지는 쪽에 마음이 기울어집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도 이런 혼동이 있었습니다. 사도의 말과 거짓 교사의 말 중 어느 것이 맞는지 혼란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 교사의 말들이 이처럼 신자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그들의 말이 인간의 욕심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을 듣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목격한 것을 전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베드로 사도가 증거하고 있는 진리가 사도가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배워서 증거한 것이 아니라 직접 본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은 여러분의 생각과 경험과 상식이 아니라 사도가 증거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사도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증거하는 내용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생각에 맞는 말로 들린다고 해도 사도가 증거한 내용을 근거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대강 믿으면 되지 그렇게 까다롭게 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예 진리에는 관심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지금 그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해도 그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 말이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일한 것은 예수님을 보고 경험했던 사도의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증거하는 것이 사도의 증거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증거한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가 직접 경험한 변화산 사건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도 경험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도 목격을 했고, 부활하신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왜 변화산 사건만 특별히 언급을 할까요?


그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신비롭고 놀라운 영광을 다른 어떤 사건이나 기적보다도 변화산에서 목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변화산에서 만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목격을 합니다. 또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도 듣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리일까요?


여러분이 신자된 것은, 어떤 기적을 목격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진 것임을 믿습니까?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분명 내 생각과 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로, 또한 성령이 오셔서 되어진 것으로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증거한 내용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교훈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가 증거한 것이 자신도 자신의 경험도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다면 누가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진리 여부를 살펴야 합니다.


병을 고치고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것이 진리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무당들에게도 병고침이 있고 사이비도 부흥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도들은 교회 부흥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병 고침을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의 증거 위에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세울 때, 신자는 어떤 거짓 교훈에도 흔들림이 없이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