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베드로후서 1:19-21  사사로이 풀 수 없는 예언

 

<본문>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베드로후서 1:19-21)



<설교>

신자에게 성경은 생명의 말씀인 진리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세상의 말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진리가 세상의 말과 같은 말이라면, 세상의 말도 진리 축에 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은 성경만을 진리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고 부처나 공자 맹자도 얼마든지 좋은 말을 남겼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같이 좋은 말들인데 예수님이 한 말만 진리라고 한다면 너무 이기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주장도 무리는 아닙니다. 성경이나 세상의 말이 같은 말이라면 성경만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다른 말이기 때문에 성경만을 진리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리를 선포한다고 하는 교회가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가령 ‘사랑하라’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증거하는 사랑에 대한 말을 들어 보면 불교에서의 사랑이나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사랑을 두고 기독교만 진리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교회가 진리를 왜곡하여 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욕심과 자기 이익을 따라 성경을 해석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감춰져 버리고 인간의 욕망으로 치장된 세상의 말만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세상이 들으니 자기들의 말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보면 사도는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앞에서 자신이 친히 목격한 변화산 사건을 말하면서 자신의 말은 사람이 공교히 만든 말이 아님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자신이 친히 목격하고 경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음을 말하는 데, 그것은 자신의 모든 말은 자신의 마음에 떠 오른 샛별, 즉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의 증거는 사람의 경험에 의한 것도 아니고, 지식에 의한 것도 아니고, 연륜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것 역시 성령의 감동 밖에 없습니다.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을 우리의 뜻과 상식과 생각을 가지고 풀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님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이 깨닫게 하셔서 성경을 해석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그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받았다고 하니까 받은 것으로 믿어줘야 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의 여부도 성경에 등장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을 근거로 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사람을 위한 말로 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을, 개인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개인의 성경 해석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으로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은 항상 자신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이 성경을 풀게 되면 결국 사람을 위한 말, 사람에게 유리한 말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자신을 향한 관심이 바뀌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죄인된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 모든 관심을 두는 새로운 마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바꾸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함으로써 마음이 새롭게 된 신자가 성경을 풀이한다면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을 위한 뜻으로, 즉 사사로이 풀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고자 할 뿐이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인생이 순종되기를 원하게 될 뿐입니다. 성경은 신자를 이러한 삶으로 이끌어 가는 길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게 되면,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되고 유익한 예수가 등장하게 됩니다. 믿음 역시도 인간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좇는 순종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좇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구속만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도의 말이든 그 말이 증거했던 것은 우리의 육신을 잘되게 하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과 또 다른 예수를 같이 증거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설교자들의 설교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펼쳐 놓고 성경이 아닌 자기 생각과, 자기 뜻과, 자기 계획을 펼쳐 놓고 그것을 강요하고 선동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목사의 말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아멘이라는 말로 받아들여 버립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에 대해서는 이미 멀어져 있고 중교적 체험과 나에게 유리한 말에 대해서만 열광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진리를 증거한다고 하는데도, 들리는 것은 세상의 말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성경을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뜻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내 뜻은 도외시 한 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서 나의 모든 뜻이 포기되어지기 전에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통해 듣고 깨달을 것을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진리가 우리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생명입니다. 그 증거를 믿는 자가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