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베드로후서 2:1-3  거짓 선지자

 

<본문>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베드로후서 2:1-3)



<설교>

신자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음을 믿는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모든 힘과 노력은 허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실천에 의해서 선한 열매가 맺어짐이 보인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신 결과로 바라볼 뿐이지, 자신의 열심의 결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가 항상 강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심을 믿기 때문에 사람의 열심을 강요하지 않게 되고, 실천을 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을 것을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인간의 육체를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것이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육체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열심을 강조하고 ‘하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소위 ‘긍정적 사고방식’이라는 사단의 말조차도 신앙으로 위장해서 그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1절을 보면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는 이단을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멸망을 스스로 원하고 취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멸망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단지 무엇이 멸망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멸망에 대해 안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멸망을 스스로 취한다고 하는 것은, 멸망인 줄 알면서 멸망을 취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자신이 취하는 것이 멸망임을 꿈에도 모른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도 모른다는 뜻이 됩니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자연히 멸망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들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셨다는 것을 안믿는다’고 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셨다는 것은, 사단의 권세에 붙들려 있던 우리를 피로써 값을 치르고 사셨음을 뜻합니다. 우리를 사셨다면 주인은 누가 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렇다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임을 부인하는 자로 산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이 자기 주인으로 살아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피 흘리게 하신 모든 것도 날 위해서라고 생각해 버린 채, 하나님은 날 사랑하신다고만 생각하면서 온통 자신의 포부와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혈의 피를 흘려서 나를 사셨다고 하는데, ‘왜 나를 사셨는지?’ ‘아무 가치도 없는 나를 사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을 집중한 채 살아가버립니다.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소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서 뭔가 받아 내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십일조 철저히 하고 주일 성수 잘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진리와 상관없는 거짓된 말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고, 사도가 증거한 내용들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절에서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의 이를 위해 말을 지어 냅니다. 말을 지어 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까? 2절을 보면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는다고 했는데, 거짓 선지자의 말이 이처럼 인기가 있고 좇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말들이 온통 사람의 탐심을 채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고 시험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풍요로운 삶을 이루어 주기 위해 오셨다’는 말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은 천국을 위한 용도로만 여기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의 탐심은 어떤 예수를 원할까요? 이처럼 인간의 탐심에 맞는 예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말에 생명이 없음은 극히 자명한 일입니다. 생명은 커녕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자기들의 상식과,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리이셨고, 이단은 오히려 그들이었지 않습니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고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서 그의 말이 옳지 않느냐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옳은 것은 성경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사람 전부가 옳다고 해도 신자는 성경을 살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되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들이 하는 것에 마음이 더 끌려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거짓선생들의 특징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커다란 조직을 형성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면서, 교회라는 조직이 커지는 것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일 뿐입니다. 진리가 사람의 머리수로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머리수를 가지고 진리의 성공 여부를 계산하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탐심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게 함으로써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에 붙들린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드러내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진리임을 알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알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그들이 진리에 붙들린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에게는 내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의 의만을 높이고 자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것을 내어놓고 인간의 것을 자랑하고 높이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도 자비도 긍휼도 알지 못한 자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진리는 결국 사람이 지어낸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멸망의 때가 가까올 수록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참된 진리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