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베드로후서 2:4-8  신자의 외로움

 

<본문>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베드로후서 2:4-8)



<설교>

‘사람이 가장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가장 큰 것은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붙이가 없고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외면함으로써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이것은 자존심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힘들게 하고 때로는 우울증에 빠지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롭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과 타협을 하고 불의와도 어울리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신자는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외롭다는 것은 사람들을 사귀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자가 가는 길이 세상과 다른 길이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을 말합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신자에게 어떤 곳인가를 의미하는 말인데, 세상은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던져 버린 곳입니다. 즉 4절에서 말하는 지옥은 영원한 멸망의 장소인 지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내어 쫓김으로써 죄가 있는 세상이 되었기에 세상이 곧 지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말합니다.


옛 세상은 노아 시대의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은 용서치 않으시고 홍수로 심판하셨으며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노아와 그 가족의 구원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서 오직 의를 전파하며 살았던 노아의 그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의 세상에서 노아 홀로 의를 전파하고 살았다면 그 외로움은 극심했을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이 노아가 전파하는 의를 환영했겠습니까?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노아를 조롱하고 외면했을 것이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외롭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경건치 않은 자들과 타협하여 함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았기에 비록 외로운 삶이었지만 의를 전파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던져진 신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경건치 않은 자들의 세상이라고 해도, 의를 전파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노아도 외롭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어울리고 같은 의 안에서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혼자였습니다. 아무도 노아의 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자로 부름 받고 의를 전파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신자인데, 신자가 세상에서 인기를 얻고 이름을 높이고자 한다면 결국 의는 감추고 세상이 원하는 말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신자 되기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과 함께 심판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역시 외로운 길을 가셨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외로운 길을 가셨습니까? 가지고 있던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신다면 유대인들로부터 온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삶을 사셨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외로운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길입니다.


6,7절에서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롯이 천사를 영접했을 때 소돔 사람들은 천사들과 상관하겠다면서 천사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때 롯은 자신의 딸을 대신 내어 주고 천사들을 보호했습니다. 롯이 그런 고통을 당한 것 역시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 속에서 신자가 의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필히 고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신자가 이러한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외면당하는 것을 견디지를 못합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외면당하기 보다는 세상이 알아주고 높여주는 길을 가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의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마음에 드는 말을 함으로써 사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타협이며 진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자가 생명을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이라고 해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찾는 사람들이 적다고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이 곧 진리의 길이며 생명임을 확고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생명에 관심이 없다면,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이 외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진리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고 거부하고 외면한다고 해도 그 길이 진리의 길이라면 담대하게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외롭지 않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힘있는 무리들과 함께 하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무리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에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을 받고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진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진리와 바꿀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