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베드로후서 2:9-16  발람의 길

 

<본문>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베드로후서 2:9-16)

 


<설교>

세상에는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굳게 믿는 믿음인 것처럼 얘기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상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이론과 사상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참된 진리를 좇는 무리는 너무 적어서 자칫 많은 무리가 추구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당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던 신자들에게 노아와 롯의 구원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숫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되어지는 것임을 권면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 공로가 인정이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믿음으로만 한결같이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시작은 무능력자이면서 믿은 후에는 능력이 부여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구원은 주님의 능력이고 은혜이지만 구원 받은 자는 주님께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한 경건한 자와 불의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경건한 자는 앞에서 언급한 노아와 롯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경건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멸망 받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지만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신다고 합니다. 즉 불의한 자는 기어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런데 형벌 아래 두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불의한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내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내어 버려두심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어 버려두심으로써 자신의 불의함을 보지 못하고 악인의 길을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자를 내어 버려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형벌이라면, 경건한 자에 대해서 끊임없이 간섭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자는 이런 사랑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험에서 건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자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이 없이는 스스로 의의 길을 갈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능력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서 어떤 열매가 맺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신자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의 나 된 것이라는 말은, 자신이 어떤 형편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증거하는 사람된 것을 뜻하는 것이지, 세상이 볼 때 자랑할 만한 자 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내가 이렇게 성공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뜻의 고백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는 은혜를 말하되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은혜로 바꾸어 말해 버립니다. 이런 모든 것이 불의한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불의한 자는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합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믿음도 은혜도 자신의 육체를 향한 자기 정욕을 이루어주는 수단과 방법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가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육체를 내어 놓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구할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주관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관하신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길로 인도해 가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주관은 우리의 정욕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축복하시면서 우리에게 복이 되는 길로 이끌어 가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맞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어 놓는 복이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복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내어 놓는 복의 수준은 결국 육신의 더러운 정욕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내가 원하고 바라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결국 주관하시는 분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주관하시는 분을 멸시하기에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는 신자들을 거리낌 없이 비방하고 조롱하게 됩니다. 노아도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비방과 조롱을 받았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었는데,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비방합니다.


11절에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천사라 할지라도 주 앞에서 송사할 수 없습니다.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판단자이신 하나님을 멸시하기에 신자를 조롱하고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누구에게도 비방과 판단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여러분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비방하고 조롱할 수 없음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신자를 조롱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멸시한다면, 그 증거는 형제를 멸시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불의한 자를 12,13절에서는 짐승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저주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는 길은 발람의 길이라고 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의 요청에 의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삯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한 것입니다. 즉 발람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가 자신에게 저주로 되돌아 올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미친 행동입니다.


그래서 짐승인 나귀에게 말을 하게 하셔서 발람의 행동을 막으신 것은 짐승조차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을 멸시하는 미친 행동임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이 확정하신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알고 진리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은 끝까지 육체의 정욕을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선포하신 심판을 멸시하기에 자기 정욕만을 따라갈 뿐입니다. 이것이 발람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