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베드로후서 2:17-22  멸망의 종

 

<본문>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후서 2:17-22)



<설교>

여러분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단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해 주고 높이기 위해서 믿으신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믿음이 진심으로 그러한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관되고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뜻과 목표를 하나님께 내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 계획이 선한 것이고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도 나의 뜻을 기쁘게 받으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야 말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관되고 있음을 믿지 않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뜻과 계획으로 세상을 주관해 가실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우리들의 욕심과 포부와 소원이 실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람이 힘써 노력하고 정성과 열심을 보이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우리의 뜻을 들어주신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자기들의 이익을 삼는 자들로서 사도는 그들을 거짓선지자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며(14절),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저주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쯤으로 여기고 목사에게 소위 축복권, 저주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선지자의 전형적인 특징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가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을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1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발람의 길을 좇는 것일 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된 선지자들의 거짓 교훈에 주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을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진리의 도를 훼방하는 것이며 주를 부인하는 것인지를 분별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믿음을 땅의 것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나의 심판을 대신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으로 기뻐하는 길을 가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긴다면 인간의 탐욕을 위한 믿음은 믿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조차도 믿음을 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의 이를 위해 탐심으로 지은 말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물 없는 샘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무익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는 물 없는 샘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 없는 샘은 목이 마른 자들에게는 실망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하지만 목이 마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샘에 물이 없는 것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다른 목적으로 샘을 찾는다면 아예 처음부터 물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의 멸망에 함께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는 비를 머금지 않은 구름을 뜻합니다. 비를 내릴 수 없으면서도 사람들에게 헛된 소망을 갖게 하는 헛된 말을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의 말은 당장에는 희망적이고 힘이 되는 말로 들리지만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담겨 있지 않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단지 말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탐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심을 죄로 고발하면서 인간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이라 할지라도 나를 부인하고 주님만 바라보라는 선포가 아니라면 그것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사단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는 말로 바꾸어서 말합니다.


어떤 말이 사람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보다는 먹어도 죽지 않고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이 더 마음에 들지 않겠습니까? 결국 사람의 마음에 드는 말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 사단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을 마음에 들어 하고 진리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진리보다는 믿으면 복 받고 잘산다는 사단의 거짓된 말을 복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사단의 미혹은 에덴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심으로 진리를 좇고자 한다면 사단의 미혹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단이 무엇으로 신자를 미혹하는지를 알고 항상 주의하며 참된 진리를 기준으로 해서 진리를 모방한 다른 교훈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랑하고 높이는 말을 토함으로써 사람들의 육체의 정욕을 자극하고 그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소위 예수를 믿고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고 기도해서 응답받고 복 받았다는 간증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사람들의 육체의 정욕을 자극함으로써 그 마음들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혹들인 것입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고 그러한 것이 진심으로 믿음의 증거로 보이지만 결국 그들은 멸망의 종에 불과할 뿐입니다(19절). 사단에게 붙들린 사단의 종으로서 진리를 훼방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복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이 여러분을 어떤 길로 인도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복음에는 복음만의 능력과 기능이 있습니다. 즉 예수를 말한다고 해서 모두를 복음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기 때문에 복음이 아니라 복음으로서만 할 수 있는 능력과 기능이 있음을 복음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과 기능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마디로 우리를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지금껏 살아왔던 사고방식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전환하게 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주인 되어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위해 힘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 되시고 목자가 되시는 분을 바라보게 하고, 그 분의 인도를 받는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된 사람의 새로운 삶의 사고방식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세상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부러워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탐욕임을 알기에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기 소원하면서 나를 인도하실 주님만 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의 열매이며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이 나의 운명이며 인생의 전부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절실하게 피의 은혜만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매인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인생의 자랑거리는 허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서 복 받고 잘산다는 얘기는 물 없는 샘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생수임을 알고, 예수님만을 구하기에 거짓선지자의 달콤한 말에서는 생수를 볼 수 없고 다만 멸망의 흔적만을 보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러한 세상에서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20-22절)고 말씀하는 것처럼 언제나 세상에서 구별된 진리의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안 것은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것입니다. 세상의 더러움은 자신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것을 추구하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나의 자랑거리를 위해 산다는 것 자체가 더러운 것이고, 그러한 탐욕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자랑거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자랑임을 알고 예수님만 자랑하고자 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별된 거룩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자기 자랑에 미혹되어 믿음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를 부른다면 그것이 곧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만이 목자임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의로우심만 높이고 증거하고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신자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으로써 진리의 길을 걷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