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베드로후서 3:11-13  새 하늘과 새 땅

 

<본문>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1-13)



<설교>

교회는 구원의 문이 될 수 없습니다. 즉 교회가 없이도 구원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그러면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는 뭐고 굳이 교회를 다닐 이유는 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신자의 사명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연관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의 여부로 교회의 이유를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구원의 능력은 되지 못하지만 교회는 분명히 존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맡긴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명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한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말을 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계신 그 나라를 함께 증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는 것은 기존의 세상을 바라보지 않음을 뜻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기존의 세상은 전혀 다른 본질의 나라입니다. 한쪽은 깨어지고 한쪽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둔다면 자연히 기존의 세상에 대해서는 모든 마음이 떠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은 깨어지고 사라질 곳에 불과합니다. 12절에서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불에 타서 사라질 곳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짊어지고 있는 장래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이루어질 일이고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로 모일 때는 항상 장래 일을 생각하면서 모여야 합니다. 내 장래 일로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처한 장래 일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고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둔 자로 모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자기 백성을 천국 보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우주를 불에 태워버리고 인간이 세웠고 자랑하는 모든 문명들이나 업적들을 무너뜨려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굳게 세울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할 교회에 대한 관심이라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된 모습으로 굳게 세워지는 것이지, 교회가 부흥되거나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교회로 변신하는 것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은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꺼리’에 많은 관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결국 즐거움의 꺼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교회를 부지런히 나오도록  하자는 속셈인데, 그런 것이야 말로 교회가 교회의 사망을 망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11,12절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가는 것은, 장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보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상태로 지으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 그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세상을 버리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세상으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존의 세상을 그대로 두고 몇 가지만 뜯어 고치는 리모델링 수준이 아닙니다.


기존의 세상은 몇 가지만 고치면 좋아지는 곳이 아닙니다. 아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썩어버린 곳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아예 무너뜨려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존의 세상이 이처럼 썩어 버린 것은 죄가 그 이유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하나님이 만드신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제각기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꿈꾸며 살아가기에 사람이 있는 것이라면 어김없이 경쟁이 있으며, 자신의 모습으로 자랑하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낙심하기도 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는 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이 세상에서 떠난 자로 살아가면 되는데, 여전히 우리는 세상 일이 내 뜻대로 안되는 것 때문에, 내가 원하는 모습을 얻지 못하는 것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세상을 헛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죄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의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때로 손해를 보게 된다고 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행실이며 경건한 삶입니다.


엡 2:5-6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입었고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땅을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 땅의 일만 생각하게 되고 땅의 일로 고민하고 염려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날은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져 사라질 그 날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날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불에 타서 사라지고 없어질 땅의 것에 목맨 채 땅의 것을 목표로 삼고 살겠습니까?


계 21:1-4절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시는 곳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세상에 사망과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죄로 인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신자의 눈물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씻기신다는 것은 죄가 없는 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소망한다면 신자는 죄를 미워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 없는 의의 나라만을 소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