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베드로후서 3:14-18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본문>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베드로후서 3:14-18)



<설교>

사도가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신자에게 고난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의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내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1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를 불렀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어디에서 불러 내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있던 곳이 어디입니까? 세상이고 어둠이 아닙니까?


그곳에서 불러내었다는 것은 신자는 더 이상 세상과 관계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을 자신의 거처로 바라보지만 신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신의 거처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나그네일 수밖에 없고, 나그네로 살기에 고난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성취하실 말씀을 조롱합니다. 지금까지 재림이 없었다는 이유로 재림도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3:5절에서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미 물로 세상을 심판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그 모든 일을 부인하면서 세상에 집착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재림이 연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모두 회개하고 멸망의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래 참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라면 날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무런 흠이 없는 삶을 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을 쓴다고 해도 흠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설사 그 행동에는 흠이 없다고 해도 마음은 언제나 흠과 점으로 가득찬 것이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사도는 그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 앞에서 흠있고 점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2:12-13절을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거짓 선생들을 점과 흠있는 자로 말합니다. 즉 점과 흠있는 것은 거짓 선생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사고방식은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긴다면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점있고 흠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에 평강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강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 채우고,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데서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존재도 없는 상태를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강은 세상의 연락을 기뻐하는 마음으로는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천국을 소망하라는 말은 하면서도 왜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천국을 말하면서 세상에서의 복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영혼도 잘되게 하시고 육신도 잘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면 사도들은 영혼은 구원받았으나 육신은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3:15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앙은 천국 하나만을 바라보는 것이지 천국과 세상을 동시에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면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조차도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약속하신 것처럼 억지로 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16에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들은 성경에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굳센 마음으로 서 있지를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결국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지 우리의 열심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가 어려운 단어를 구사하며 편지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존의 상식과는 전혀 상반된 말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사도와 같은 한 성령 아래 있다면 사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이해가 되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억지로 푸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미 진리와 상관없는 인간의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만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본다면 이해 못할 내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심정으로 사도의 말을 대한다면 모든 말이 진리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두며, 내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고 나를 자랑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것이 신자의 본문이며 사명임을 안다면 사도의 모든 말은 생명의 복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사도의 결론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자라간다는 것은 많이 알아가는, 즉 머리에 지식이 쌓여 간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항상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것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이유를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과 흠이 없는 경건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