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1:1-2  그리스도의 종


빌립보서는 흔히 ‘기쁨의 책’이라고 부를 만큼 기쁨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자기 기쁨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너희도 기뻐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안에서의 기쁨은 성도로서 당연한 것이니 그 당연한 기쁨을 누리라는 의미입니다. 즉 ‘기뻐해 다오’라는 부탁의 말이 아니라 주안에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가?’를 제 스스로에게 물을 때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무엇인가 알고 그 기쁨으로 잠시 살다가도 조그만 일로 인해서 기쁨이 상실되는 것을 수시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바울이 참으로 부러울 수밖에 없었고, 제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분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당연히 있어야 할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해서 빌립보서를 말씀드리기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고 스스로 말하고는 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서 누릴 수 있는 복된 상태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신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 편지를 썼을 때 그의 형편은 결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기뻐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거의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형편이 좋으면 기뻐하고 기분이 좋고, 좋지 않으면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나약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믿음의 능력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살피면서 옥중에서도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의 편지를 대함으로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은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의 이유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가 굳게 세워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고, 사도 바울의 그 기쁨에 함께 동참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에 공감이 가고, 우리 역시 그 기쁨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빌립보서가 증거하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맺어진 열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시대와 상황을 뛰어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성령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른 분으로 역사 되지 않는 한 동일한 성령 아래서는 다른 새로운 삶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은 어느 시대건 어떤 상황이건 동일한 원칙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를 통해서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은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바울을 기쁨으로 살게 했습니다. 이 기쁨을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십니까? 아니면 혹 삶에서 복음의 능력을 전혀 맛보지도 못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복음의 능력이 나 자신의 삶에 어떻게 역사되고 증거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복음을 말한다면 그 복음은 속 빈 강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듯한 옷을 입고 있는 마네킹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증거되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우리 역시 말로만 그리스도 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삶에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증거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구절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서신서의 구조는 항상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그 후에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사회의 서신의 형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대로 바울은 먼저 편지를 쓰는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언급합니다. 우리는 종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대한 관계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말에 대해서 별 다른 느낌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단지 통속적으로 사도에 대해서 소개하는 단어 정도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말은 한 개인에 있어서는 그 인생 전체를 좌우해 버리는 엄청난 말입니다. 알다시피 종이라는 것은 그 인생 전체가 주인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하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삶은 종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종이라는 말은 어떤 권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종이 주인의 높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누리려고 한다면 그는 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일컬으면서 어떤 권위를 누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종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종으로서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다운 종은 누구이겠습니까?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주인의 의도를 살피면서 주인에게 순종하기를 힘쓰는 그가 바로 종다운 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챙기려고 한다면 이는 종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는 무지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종에게 종으로서의 권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종으로 살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분명 거부할 것입니다. 세상은  누군가의 종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한 역사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한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세상은 종 되기를 거부합니다. 자유를 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구속을 받고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인간으로서 극히 당연한 권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이 창조주의 위치에 누군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조직사회이기 때문에 질서 차원에서 상급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고 상급자 역시 하늘에 주인이 있음을 알고 종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에게 있어야 할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주인은 오직 하나님일 뿐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분은 목사도 장로도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을 다스리고 지배한다는 것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가 동일한 지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체가 다른 지체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없듯이 목사와 성도도 같은 지체로서 그리스도 앞에서 동일한 종의 위치에 있는데 어떻게 목사가 성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목사 스스로 머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고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를 점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기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마음에 주인을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스스로 주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누구의 다스림도 받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어서 사사기의 이스라엘처럼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섬긴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 자신을 포기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오늘날 교회에는 교인은 있으나 종이 없습니다. 목사의 종은 있지만 그리스도의 종이 없습니다. 목사가 돈 많은 장로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것은 있는데 목사로서 그리스도의 눈치를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살피며 살아가는 것을 보기가 희박해졌습니다. 참된 종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가서 바울은 자신만을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 역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분명 바울이 쓴 서신서이지 바울과 디모데의 합작 편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은 디모데와 자신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과 디모데는 동일합니다. 같은 죄인이며 동일한 은혜로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를 서로 다르게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바울은 사도지만 디모데는 사도인 바울의 일을 도운 사람이라는 것,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디모데보다는 바울이 더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울은 디모데보다 한 수 위의 사람이고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디모데는 그리스도의 종을 도운 사람으로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관계인 것입니다.



분명 세상의 시각은 그가 행한 업적이나 위치 등등을 가지고 높고 낮음을 따지고 구별합니다.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가 구별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영적인 일,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성도는 목사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전도사를 어떻게 대합니까? 거의 대부분이 목사에게 고용된 자로 대하지 않습니까? 전도사는 목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 버립니다. 목사의 일을 보조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목사의 종이라는 시각이 강하지 않습니까? 목사나 전도사나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시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라는 것은 직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느냐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고자 수고할 때 그는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과 동일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믿는 예수와 전도사가 믿는 예수, 성도가 믿는 예수가 각기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령 역시 각기 다른 성령이 함께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은혜 역시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차별성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서 구별되어서 자신의 이름이 높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부패성이며 악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목사들 안에서도 교회의 크기와 성도의 수 헌금 액수에 따라서 구별하는 악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만큼은 여러분의 마음에 굳건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하는 일의 여부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직분이나 일하는 양에 의해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결코 복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과연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려는 마음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다만 이것을 염두에 두십시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은 주인의 지시와 주인의 결정에 순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으로서 주인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계획을 세우시고 어떤 결정을 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과연 이러한 종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히든 매를 맞든 그 모든 상황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주님이 결정하신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불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기꺼이 그 상황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역시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과 동일하게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종으로서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없이 다만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그 이름만을 즐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라는 것은 칭호가 아닙니다. 실제적 사역을 의미합니다. 목사 일을 하는 그런 사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역시 종으로서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종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려지는 칭호로서 종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성도와 차별되어져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리는 특권을 즐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단지 누리는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예수를 믿는데 나에게는 기쁨이 없는가?’ ‘왜 예수를 믿는 평안이 없는가?’라는 근심을 가지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도로서의 기쁨과 평안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지 못하면서 기쁨과 평안이 없다고 한탄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비결을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행복을 쉽게 얻으려고만 합니다. 그저 내가 누리고 소유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결코 그렇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바울은 이 서신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쓰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예수 안에 사는 성도이면서도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그럴 수가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는 자가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사는 자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스도안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못해서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성도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에 의해서 기쁨을 잃어버리는가를 깨닫고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기쁨을 회복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출발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은 과연 어떠한 믿음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믿음을 이용해서 그리스도로부터 무엇인가 누려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으로 인한 수고와 희생 섬김은 없이, 한마디로 말해서 내쪽에서의 고통과 손해는 전혀 없이 단지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수고하고 희생하는 삶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했을 때 그 일에서 보람을 느낌으로 즐거움을 얻습니다. 자기 만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하고 높으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봉사를 해도 남을 위해 봉사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자신에게서 성령의 일하심을 볼 수 있기에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기쁨과 즐거움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수고하며 살아감으로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멋대로 살면서 다만 교회에 출입하는 것으로 다된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묻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십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려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의 중심은 그리스도시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분임을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라고 믿고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는 것은 묻지 마십시오. 지금 그렇게 사느냐는 것도 묻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