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예수 안의 성도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처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라고 일컫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라고 하면 단지 교회 다니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칭호 정도로만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도라고 부르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기에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 되는 기준이 ‘교회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성도라고 말을 함으로써 예수 안의 사람과 예수 밖의 사람으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이며,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성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이나 교회를 다니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함으로써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성도 역시 사망을 이기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사망이라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었다는 그것이 성도에게 사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로 인해서 누리게 된 영광스런 상태입니다. 이처럼 영광스런 성도라는 신분이 우리가 착한 일하고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성도’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주어진 이름입니다. 우리를 성도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성도로 불리운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성도라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안이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일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갚아야 할 죄 값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가 뭔가 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성도는 다만 누리고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자신의 힘으로 누리고 싶은 것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과 예수 밖의 구분은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것을 누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뭔가 해결하고 얻기 위해서 애를 쓰느냐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죄 값을 갚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뭔가 죄가 가벼워지지 않겠는가라는 의도를 가지고 고의로 선한 일을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선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 흘리신 주님의 죽으심을 멸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자신의 행위를 사랑할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되는 자기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할 때 단번에 하나님을 원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늘의 영광스러움을 누릴 수 있는 복된 나라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안에 걸맞은 모습, 즉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공짜로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음을 안다면 그것이 예수 안이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항상 사람들은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라는 반문을 함으로서 예수 안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무지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서 행할 것과 행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달라지고, 그때 그때의 감정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은 착한 일이니까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그 생각대로 행동한 적이 얼마나 있습니다. ‘이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까 해서는 안돼’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행위를 거부한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뇌물 주는 것이 옳지 못함을 알지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뇌물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여러분이 세상에서 하고 있는 경험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이 예수 안은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것을 다만 누릴 뿐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라는 반문을 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마치 ‘이것을 하라’고 말만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습니까? 기껏 하고 있는 것이 교회 다니는 것과 교회 안에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것조차도 성도 되는 조건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행위를 가지고 ‘나는 성도다’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인간이 ‘하라’는 말만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이냐’라고 반문한다면 결국 허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능력한 자신의 처지에서 예수 안이 오직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것을 누리고 감사하는 나라임을 안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알았기에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곧 은혜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예수 안의 성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나는 심판과 상관이 없는 의의 사람이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값을 우리에게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대신 받으셨고, 그것을 우리에게서 받으신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죄와 상관없이 된 것이고 이것을 믿는 자에게 성도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시 또 갚아야 할 죄값이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죄값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무지한 생각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징계함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징계함으로 가르치고 자기 백성다운 자로 만들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주어지는 징계입니다. 하지만 죄갚음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죄갚음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사망’에 처하는 것이지 겨우 세상일이 잘 안되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행위를 보고 성도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도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 행위를 통해서 성도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론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의로 얻은 것이지만, 구원 후에는 의의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행위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성도된 사람이라면 뭔가 달라지는 행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보여지는 자연스런 열매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위가 없다고 해서 예수 안에서 쫓아내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그것이 은혜의 땅에 존재할 수 없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으로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예수 안에 합당하지 않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단지 ‘나는 교회 다닌다’ ‘나는 예수 믿으므로 천국 간다’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처럼 가난한 성도는 없습니다. 예수 안의 풍성한 것은 모두 놓쳐 버린 채 단지 ‘성도’라는 명목만 붙들고 있는 가난한 성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빌립보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안에 성도들에게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은혜와 평강 이 모든 것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은혜와 평강을 말해봐야 그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와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안의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 안이라는 것이 그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 복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누릴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복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왜 기뻐할 수밖에 없는가 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절에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 안에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4:11절의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 역시 예수 안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니라 예수 안이라는 특별한 영역으로 국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세상이 말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빌립보의 예수 안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안의 성도들만의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밖의 사람들, 즉 세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말을 할 필요도 없으며 이런 말을 들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의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의 성도는 결코 세상 것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의 성도가 세상 것으로 인해서 기쁨을 상실하고 행복을 잃어버리고 낙심에 빠진다면 이것은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예수 안’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거저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예수 안에서 또 다른 계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과 집사들에게 편지한다는 말을 보면 마치 성도와 감독 집사를 각기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과 집사라고 언급하는 말은 감독 집사 역시 모든 성도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 안에 감독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집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안에서 아무 차별이 없이 다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이며 그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역할 분담은 있을지 언정 계급은 없으며 지위의 높고 낮음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는 말을 하면서 빌립보의 모든 성도들이 자신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자신이 참예한 은혜와 빌립보 성도들이 참예한 은혜를 서로 구분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도는 세상에서 구분된 사람입니다. 구별되어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거룩한 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자체가 거룩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하셨다는 것 자체가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구분하여 성도 되게 하신 것은 세상 것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 있음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예수 안의 사람으로 구별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단지 천국 보내겠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이라는 은혜의 세계, 참으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의 세계를 살아감으로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 능력의 세계가 바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자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있고 없고를 초월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를 하늘의 풍성한 복으로 인해서 자족하며 감사하고 살아가는 능력의 세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의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사명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가 된다거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목사로 살든 집사로 살든, 선교사가 되든 뭐가 되든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곳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명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성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성도’라는 이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성도를 부르는 통속적인 말로 여기지 마시고 ‘예수 안’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생각하시고 그 세계로 구별되어서 부름 받은 성도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성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누가 뭐래도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하지만 ‘나는 성도다’로 끝내지 마시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구별하여 예수님 안의 성도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무엇에 쓰시기 위해서 성도 되게 하셨는지 깊이 묵상하신다면 여러분이 구별된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