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은혜와 평강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인간에게 베푸신 덕에 대한 고마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기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자신이 받은 세상 것 때문에 감사하고 그것을 은혜로 말한다면 그는 아직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며, 나와 같은 은혜를 받지 못한 너와 나는 다르다는 구별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세리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데 자신들은 그들과 같지 않고 기도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지만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기도를 하면서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과연 겸손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만하면 신앙이 있는 것이고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결론짓기를 즐겨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우리가 세리들과 같지 않고 기도도 하고 십일조도 하는 사람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기도를 했다면 과연 그것을 신앙이 있는 자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으니까 자신이 했다고 믿지 않고 하나님이 해준 것으로 믿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곡해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면 어떤 식의 은혜이겠습니까? 물론 저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되었다는 것을 은혜로 말할 것입니다. 저들은 안하는 것을 우리는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이고 자부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랑스러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을 자랑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바리새인과 반대로 세리는 자기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세리는 남에게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은 부끄러운 존재이고 죄인이라는 것으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보다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왜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 같습니까? 바리새인이 세리를 무시했기 때문으로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기도하고 십일조하는 자신을 자랑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까? 반면에 세리는 그저 자기를 죄인이라고 낮추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진 것 같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역시 인간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런 내막도 모르면서 기도할 때는 부지런히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이같은 오류를 많이 범합니다. 기도할 때보면 ‘죄인’이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일 수가 있으며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기도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란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에게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을 내어놓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진심으로 의로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신자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못했고, 세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성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이 죄짓기 전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었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서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가 온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의로우시고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곧 인간에게는 의로움이었고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생명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어 버리신 것은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내린 벌이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재성이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필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자신을 생각한다면 돈있고 직장 있는 자신이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을 생각할 때 참으로 부끄러운 죄인임을 안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결국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기도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떠함을 인식한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 세리처럼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의롭다함을 얻는 기도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어떤 말을 했느냐를 생각하기보다는 ‘나는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면 빼놓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편지니까 단지 인사로 하는 말로 가볍게 여기고 지나치면 안될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인사말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의 문제점은 흔한 것은 가볍게 여기고 지나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역시 별 생각 없이 지나쳐 버립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실수가 바울이 말하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서도 소홀한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평안히 잘 지내기를 기원하고 있구나’라는 정도로 여겨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으로만 인식하는 것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때가 있고 나쁜 것을 주실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사랑에서 행해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식하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은 좋은 것으로, 고통과 괴로움이 되는 것은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하나님이 주신 것 역시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구분을 하게 되고,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바울의 말을 대한다면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를 잘되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시기를 원하는 인사로 받아들일 것이 자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와 평강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에게는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로서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 자로서의 삶입니다.

이 두 삶은 마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처럼 이레에 두 번씩 기도하고 철저하게 십일조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 자신들을 그러한 자 되게 하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바리새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자신이 바로 불쌍히 여김 받을 죄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도 변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을 남과 다르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죄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신 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형편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곤란을 받고 있는 자신의 형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를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에서 은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죄인이라는 인간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단지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은혜 운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이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에게 받은 좋은 것이 있습니까? 바울이 예수 믿기 전보다 예수 믿은 후에 형편이 더 나아지고 삶이 윤택해졌습니까? 오히려 바울의 예수 믿은 후의 삶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같은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바울이 말하는 은혜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진 불쌍한 처지의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 관계가 회복되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신자라면 자신의 죄인됨을 자기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성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진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 회복을 위해서 인간의 본래적인 죄가 해결되어야 했고, 하나님은 이것을 독생자 예수님에게서 받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요구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그 혜택을 죄인된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죄인됨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은혜는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삶의 혜택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신자된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회복되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으로 되어진 것인지에 대한 깊은 자각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임을 알게 하고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은혜를 말함과 동시에 평강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있을지어다가 아니라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평강은 단지 교회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다툼이 없고 아무 일 없이 교인들이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평강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끼리 어울려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많은 교회가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교회를 꿈꾸지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혹 하나님과 상관없이 단지 교회라는 모임에 대한 소망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평강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이루어진 평강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강이 깨어진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강이 깨어진 관계에 있던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불만을 보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과 상황에 대해서 언제나 못마땅함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자기 생각을 따라주기만을 바랄 뿐 자신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순종해야 함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반대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어떠함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된 것이 곧 평강입니다. 그리고 이 평강이 이루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필요치 않다고 여깁니다. 물론 우리의 일을 도와주고 잘되게 해주는 은혜라면야 얼마든지 원하고 기다리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운운하는 은혜는 세상을 사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단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나오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사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별반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여러분을 잘살게 하는 도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행하실 세상의 마지막 때가 이르렀을 때 우리를 붙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신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진심으로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은혜에 대해서 긴가민가하는 느낌이 있을 수 있지만 심판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여실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현재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마지막 때를 미리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았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새로운 인간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임을 안다는 것은 죄인된 자의 비참함과 그 비참에서 구출된 것에 대한 다행함을 안다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그리스도의 모든 일을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변질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간을 생각하지 않음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은 죄의 여부를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게 됩니다. 인간의 본질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해결해 버리고 나머지는 나쁜 짓을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의 여부로 죄인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조직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인간의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면서 아담이 지은 원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두 해결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와 원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재성을 잊어버린 채 단지 죄 안짓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만 보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서 현대 교회에서 눅 18장의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은 기도가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와 다르다고 하면서 ‘너는 죄인이다’는 판단이 난무함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은 문제가 없는데 모든 문제가 저 사람에게 있다는 식입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조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신자는 의인되었다는 것이 성경이고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신분이며 심판과 상관없는 영광스런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지 이제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살아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이라는 신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였는가? 즉 죄인이라는 존재성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은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인이라는 신분은 죄인이라는 본래적인 성품을 근거로 했을 때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아는 것은, 그 죄가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고, 그러한 죄가 용서받았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인간과의 관계에서 용서하는 삶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본질은 모두 같습니다. 그가 어떤 행위를 했던 상관없이 본질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두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에 행위를 근거로 해서 ‘너는 죄인이다’는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서 그러한 판단을 보인다면 과연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아래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된 인간의 존재성을 자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은 교회로 함께 모이는 성도와의 관계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나는 너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다같은 죄인이라는 인식 아래 용서함이 있는 교회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관계에 있는 교회입니다.

고후 5:16-17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서 피조물의 존재 자체가 달라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알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피조물된 자만이 자신은 창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았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를 말하는 사람으로서 과연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행여 은혜라는 말은 무성하지만 정작 은혜로 인해서 맺어지는 열매는 아무것도 없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