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성도의 교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은 8절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의 성도들을 사모하는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성도는 그냥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말을 생각하면서 과연 성도와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항상 간구했던 것은 그들이 복음을 알게 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서로가 교제함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어떻습니까? 교회라면 성도가 교제하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성도가 교제하는 것 때문에 바울처럼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그것 때문에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복음은 십자가를 말하는 것으로 다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누구에게나 십자가만을 말함으로서 복음을 아는 자로서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겨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입술로 십자가만 말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서 복음의 흔적을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복음에서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바울은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란 과연 무엇일까요?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으로서 친하게 지내고 가끔 서로의 집을 방문해서 얘기를 나누고 음식을 대접하고 나눠 먹는 그런 것만을 성도의 교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러한 교제는 서로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라면 복음과 전혀 상관 없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친하게 지내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성도의 교제라면 분명 사도 바울은 너무 과장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있는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교제는 그러한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복음에서 교제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복음에서 교제한 것, 이것이 바울에게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에서 교제한다는 것에는 한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복음을 아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기에 복음에서 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그들이 복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했던 것이고, 이렇게 볼 때 결국 바울은 단지 그들이 교제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 감사하고 기쁨으로 간구했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교제를 통해서 복음의 흔적과 그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교제는 아무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더더구나 찾아볼 수 없는 교제입니다. 오직 복음으로 모이는 교회라는 특이한 모임에서만 가능한 교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오늘 우리들의 모임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분명한 답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은 복음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성도의 교제는 필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성도를 서로 교제하는 관계로 이끌기 때문에 복음이 있다면 성도가 교제함은 자연히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의 교제가 희미하고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복음을 말만 할 뿐 복음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교제는 복음을 말하는 우리들이 과연 복음으로 살아가는 지를 점검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교제가 희미하다면 그것은 교회라는 단체가 서로 친하게 지나지 못한다는 인간적 관계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본래적인 문제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제라는 것은 서로가 교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몸과 몸이 만나는 교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교통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교통함이 없는 교제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이 교통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 사랑과 탐욕이 머물고 있는 죄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사랑과 자신을 위한 탐욕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서로 교통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마음이 서로 뜻이 맞고 함께라는 관계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서로 하나되고 교통할 수 있는 것은 공동의 적을 공격할 때일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적이 되는 사람을 함께 공격할 때 그 때 둘의 마음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두 마음 모두가 자기에게 적이 되는 자를 공격해서 자기 유익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탐욕에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기에 마음과 마음의 교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제’도 불가능한 것이 인간 관계인 것입니다. 인간관계로서의 교제는 내 뜻, 내 생각과 같은 사람끼리 이루어집니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교제는 부자는 부자끼리, 배운 사람은 배운 사람끼리 어울려지는 것이 자연스런 모습이 아닙니까? 결국 이것은 조건과 조건의 교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교제하는 것은 그러한 세상적인 조건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의 성도들이 복음에서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은, 빌립보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인간적 조건과 형편, 그리고 내 생각과 내 뜻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능한 것이 교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곧 복음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에서 교제하였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기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기에 그들이 바울의 마음에 있게 되었고 그러기에 그들을 그토록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음을 보여준 증거는 그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성도의 교제는 세상적 조건을 모두 벗어버린 상태에서 가능합니다. ‘나는 이런 지위를 가진 사람인데 저런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내 체면을 구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조건을 높이 보는 세상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세계인 교회에서는 결코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지위와 가진 것을 조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잘 알 것입니다. 은혜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은혜가 아니었던들 소유하고 있는 돈과 상관없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상관없이, 세상 그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그는 멸망을 받을 자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본래적 신분이며 처지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인간이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에 비참함에서 구원되고 생명을 얻은 자 된 것입니다. 이 은혜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 증거는 자신의 몸에 걸치고 있는 세상적 조건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몸이기에 서로가 지체의 관계에서 교제하는 것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교회에 성도의 교제가 없다면 그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한 자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에 세상적 조건으로 인한 차별이 보여지고, 어떤 의견차이로 인해서 다툼이 보여진다면 그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아는 그리스도의 성도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그렇게 여기십니까? 복음을 아신다면 여러분의 삶은 복음을 지키는 도구로서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아신다면 은혜에 참여한 자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물을 함께 복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는 성도로서 모이는 교회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여러분에게서 보여지는 열매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복음을 말하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복음을 지키고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닐지 모릅니다. 아예 복음을 지키는 문제나,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지 모릅니다. 다만 복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의 할 일이 복음만을 말했다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 하나님에게 택함을 입었다면 복음을 담은 그릇답게 복음을 팽개치지 않고 복음을 담은 채 살아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그릇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담은 그릇과 그릇으로 만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릇에 담겨 있는 복음입니다. 비록 그릇이 무시되고 손상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릇을 지키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때로 그릇된 우리가 그릇을 지키고 그릇이 손상을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복음이 쏟아지고 복음이 버려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 증거가 성도의 교제가 깨어지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서로 교제하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교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서로 모여서 먹고 마신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한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모임을 갖고 함께 어울렸다고 해서 교제가 잘 되고 있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만나는 성도의 교제는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형제에 대한 판단을 무너뜨립니다. 나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할 자임을 알기에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만나는 성도의 교제는 그가 아무리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또한 자신과 함께 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세상적인 조건은 쓰레기와 같음을 알기에 자신의 조건을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만나는 성도의 교제는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과 뜻에 맞지 않게 행동한다고 해도 마음에 거리를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내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중요하기에 내 뜻을 세우기 위해서 형제와 다투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은 복음을 믿는다고 하고 복음만을 말한다고 하면서 정작 복음을 지키는 삶에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혜에 참여한 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도 거리가 멀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서조차 항상 보여지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성도의 교제에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몸과 몸이 어울리는 것이 다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교통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교통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뜻과 생각을 포기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에 감사하고 복음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는 그 마음으로 모일 때 교회는 복음에서 교제할 수 있고 그 교제로 인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결코 나와 예수님의 1:1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과 예수님의 관계가 바르다면 그 증거는 함께 교회로 모이는 성도와 성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바울이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관계로 모이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은석교회에서 보여져야 하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교통하는 성도의 교제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