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착한 일


여러분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여기십니까?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미래의 보장을 현재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현재의 조건과 상황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내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가 좋지 못할 때 미래에 대한 결과까지 좋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낙심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의 기초를 현재적인 조건과 상황에 두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일치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6절을 보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확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깨닫는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 모든 확신의 기초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현재의 조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할 때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고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공부를 잘한다는 현재적인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그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기 마련입니다. 미래에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나 기대를 가질만한 조건을 현재에서 전혀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 문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 낙심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신앙의 미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의 확신을 가질만한 조건을 자신에게서 찾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생각처럼 하지 못하고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에 머물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의 신앙의 미래에까지 불안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의 마음이 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만약 현재적인 조건이 미래에 대한 확신의 기초가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마음이라면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도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을 따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바울은 6절에서 확신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그 확신은 자기 의지도 아니고 확신의 조건될 만한 것을 현재의 모습에서 찾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현재적인 조건대로 한다면 낙심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뭔가 확신을 가질만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서신을 쓸 때의 상황은 복음으로 인해서 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옥에 갇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확신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바울의 확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말한대로 사람들은 현재에 되어진 자신의 상황과 형편을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짐작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상황과 형편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까지 의심을 하고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힌 절망적이면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도 바울의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현재의 상황이나 형편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고, 불안과 염려에 빠진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기초가 크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힘들게 만든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확신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볼 때 사도 바울의 확신의 근거는 시작하신 분이 이루신다는 것을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확신의 근거이며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확신의 근거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확신의 근거는 결코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라든지 자신의 열정을 근거해서 일이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깨달아야 할 확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확신과 낙심의 근거를 항상 자신의 현재 조건과 상황에 두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좋으면 그것으로 확신을 하고 좋지 않으면 불안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리고 전혀 다른 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근거한 확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조차도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확신을 가져라’는 말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신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확신을 가져라’고 다구친다면 확신을 하고 싶어서 확신이 되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마치 확신이 없는 것이 신자로서 믿음이 없고 의지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가졌던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확신은 인간의 의지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마인드 콘트롤’이라고 해서 자신에게 스스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난 할 수 있다’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의지가 나약한 사람이라거나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바울이 이해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 22:13절에 보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과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본문을 비교할 때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하신 이가 이루신다는 것과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요 나중까지 하나님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루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의 자신의 상황과 형편을 보면서 실패와 성공을 판단합니다. 지금의 형편과 상황이 좋으면 성공이라고 말하고 나쁘면 실패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패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패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은 분이시고, 처음과 나중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고 왜 우리에게 실패가 있느냐?’라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성공을 우리 자신의 일을 성공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가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성공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내 일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 성공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악한 죄인의 손에 의해 죽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세상에서의 우리 일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고 전혀 원치 않는 상황과 형편으로 되어 졌다고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하나님의 일을 ‘착한 일’이라고 언급합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있는 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힘은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염려하면서 낙심한다면 그것은 곧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을 이루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낙심과 염려를 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자신의 힘으로써 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가 행한 일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일의 시작과 이루어짐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면 결코 인간의 행함을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힘이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낙심이든 염려든 아니면 자랑이든 교만이든 이 모든 것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울의 확신에 기초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나 없이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진심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인지에 대해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참된 믿음은 일의 시작과 이루어짐을 하나님에게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은석교회의 시작을 누구로 보십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성경대로 한다면 분명 하나님입니다. 비록 인간이 주축이 돼서 출발한 교회임은 분명하지만 시작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은 다만 하나님이 은석교회를 시작하기 위해서 모으신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작하신 분이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바울과 같은 확신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시작을 빌립보의 성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분께서 시작하신 일을 그분이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개인적으로도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에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염려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자기 고백과 전혀 반대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교회에 대해서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머물지 못하는 믿음없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에 서서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현재의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실 줄을 확신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개인의 신앙에도 동일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염려는 돈 문제도 아니고 부흥의 문제도 아닙니다. 즉 교회의 재정이나 부흥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에 시작하신 것은 착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를 시작하시면서 교회를 부흥시키겠다거나 이름난 유명한 교회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빌립보 교회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을 뿐입니다. 그 착한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은석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은석교회를 시작하셨지만 그것은 은석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한 시작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많은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멀리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은석교회를 시작하셨다고 여기고 그렇기 때문에 은석교회는 부흥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시작과 끝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빌립보의 성도들 속에 시작하신 착한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빌립보의 성도들을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까?



‘착한 일’이라는 말을 할 때 여러분은 학교에서 배운 착한 일을 기억할지 모릅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주은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신자의 속에 그러한 일들을 시작하셨다는 말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착한 일은 우리가 세상에서 배워서 가지게 된 지식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사도행전 10:38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루 다니면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면서 행하신 착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길가던 노인의 짐을 들어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는 언급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오직 생명과 연괸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존재가 어떠하며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하셨습니다. 병을 고치시면서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 오셨음을 보이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착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착한 일을 빌립보의 신자들 속에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착한 일이 시작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게 되고 결국 인간은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전혀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착한 일이 시작되어진 성도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시작하시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 즉 궁극적인 마지막의 성취의 날까지 쉬지 않고 일하시며 이루실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을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어려운 상황으로 인도하시면서 여러분을 가르치시고 강권하시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서 행동하시고 활동하신 그 결과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에 있어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니까 여러분은 마음놓고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여러분의 현재 상태나 생활의 모습 때문에 영적인 문제에 잘못됨이 있지 않을까라는 염려나 불안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로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셔서 착한 일을 시작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내가 바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가 하신 십자가의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속에서 시작되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아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옛사람의 성품을 떠나서 새 사람의 성품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기쁨보다는 그리스도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에 주님의 그 마음으로 희생과 섬김으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니까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겠다는 발상은 하나님의 착한 일이 시작되어진 성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증거는 바로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속 사람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몰랐던 사람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했던 사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 속에 시작된 착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계속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뭔가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깨달음이 있을 때 그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속에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나님의 착한 일을 체험하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자 하는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날에 하나님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신자는 완성되어진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거룩한 열매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의지나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문제라면 우리가 보일 것은 실패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무능함을 아시기에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빌립보 성도들의 교제는 바로 하나님이 그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교제로서 하나님이 행하신 흔적을 발견했기에 하나님에게 감사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은혜안에서 성도가 교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흔적임으로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능한 존재이며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되어진 은혜임을 의심하지 않으신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쉬지 않고 그 일을 이루시는 결과입니다. 그것으로 감사하시고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착한 일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