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  바울의 기도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분별,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신자가 분별력이 없다면, 선악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에 오류가 생기게 되고 결국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악을 선으로 여기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에 있는 사람을 악에 있다 하게 되고, 악에 있는 사람을 선에 있다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나름대로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깁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선악은 자기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과 유익을 기준으로 해서, 그리고 자신이 학습한 도덕과 윤리에 기준에서 선악과 옳고 그름을 판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분별력은 자기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하는 진리가 기준 되어서 우리를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타인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자기 자신을 분별하고 판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분별을 받아야 신자는 선악에 대해서, 옳고 그름에 대해서 바른 분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말씀이 자신을 분별하는 것을 거부해 버립니다. 자신이 하는 것은 모두가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타인을 분별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기준 되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함으로 자신 스스로 심판자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분별력이 성경을 안다고 해서 바르게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므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다면 분별력을 기르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은 배워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타인을 분별하게 되면 결국 그것은 지식의 분쟁으로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을 읽어보면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우상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우상제물을 먹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지식을 기준으로 행동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바울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역시 고전 8:1-3절을 읽어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바울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다른 지식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이 지식이 자칫 잘못하면 지식의 분쟁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분별은 지식이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형제로 하여금 우상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먹어도 된다는 지식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없는 형제를 위해서 자신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형제가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행동이 지식을 근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근거한 행동이며 바울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은 오직 사랑이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분별을 가르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내가 기도하노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바울이 기도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에게는 의문이 없었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되겠네’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면 굳이 인간이 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인데 왜 기도를 하는가?’라는 생각은 안드십니까? 이치대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이 어떤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를 하든 안하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만 봐도 바울의 기도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빌립보 성도들 스스로의 열심으로 의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득하기를 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의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그런 기도를 합니까? 그리스도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바울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인간이 기도를 해야 예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예수님이 하시려고 해도 인간이 기도해주지 않으면 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까? 분명 이것도 아닐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기도를 인간이 계획하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이해에서 앞서 말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하는데 기도할 필요성이 있는가?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만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의점을 찾아낸 생각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신자에게 맡겼다. 따라서 신자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이루신다는 것과 반대된 것임을 생각할 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더욱 더 혼동스럽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2:12-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말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성도에게 이루라고 말했으면서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행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행하신다면 굳이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또 빌립보 성도가 구원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행하게 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혼란이 없습니까? 그러면 이제 이 혼란을 정리해 보고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이 독자적인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인간은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지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목수가 쓰는 망치처럼 아무 생각도 없고 소원도 없는 상태에서 성도는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또 다시 나올 말은 ‘그럼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겠네’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로 행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도구라고 해도 역시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옛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된 새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의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는 말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의 생각과 의지는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사람이 행하나 사람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행함은 자신의 행함이 아니요 맺어지는 의의 열매도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신자의 안에서 행하시며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의 공로는 당연히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기도는 하나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해서 얻어내는 수단으로 잘못 오해된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기도는 자신이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원대로 행하며 살아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경우 그 소원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소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과 성도의 뜻이 하나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소원은 포기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자기 속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의 결과임을 알고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도 하나님이 그 속에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흔적이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성도로서의 증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에 대해 전혀 모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기도와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도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날 교회가 소원하고, 우리가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정당한 것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바울의 이 기도는 자칫하면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더욱 더 풍성해지고 자라기를 원하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됨으로 인해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분별의 기준은 지식이 아닙니다. 우상 제물에 대한 바울의 경우를 말씀드렸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분별의 기준은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 증거되는 것이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사랑의 지식과 총명이 풍성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교회는 성경학교가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이 보여지는 현상 가운데 하는 지식에 대한 논쟁입니다. 물론 각기 다른 지식으로 인해서 얼마든지 서로 토론을 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을 기초로 하는 논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데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말을 하는 너는 틀렸다’는 단정을 하고 상대방의 지식이 틀린 것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논쟁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지식을 위한 논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배워서 머리에 쌓게 되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 인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는 총명이 풍성해질 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지식을 굳게 세우려고 하지 마시고 우리 속에 시작하신 하나님의 착한 일,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세우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상 제물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염두에 두시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교회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주일 성수’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신앙적 분위기이며 또한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신앙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신자라면 ‘주일성수’에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주일성수를 위한 지침으로 가르치고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 즉 주일에는 돈을 쓰지 말아라든가, 공부를 하지 말아라는 등의 규례가 잘못된 것임을 알 것입니다. 물론 주일에 돈을 쓰고 공부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쓰든 쓰지 않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그러한 지식이 없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주일에 돈 쓰면 안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돈을 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바울이 이런 경우였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우상 제물의 경우를 보면 아마 바울은 형제를 위해서 영원히 주일에는 돈을 쓰지 않겠다는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과 총명이 풍성함으로 인해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선한 것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인해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머리에 있는 지식을 옳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지식을 가지고 서로 모인다면 결국 서로 양보하지 않는 지식으로 인해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논쟁이 생기면 무조건 ‘그래 네 말이 옳고 내 말이 틀렸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 사랑을 따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분별하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원해서 그러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루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성경에 박사가 되고 복음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일까요? 복음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기쁨이라면 나이 드신 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거리가 먼 것입니까?



사실 신자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고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분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어떤 일에 쓰시려고 하는가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삶에 있어서 선한 것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러한 분별이 어려움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에게 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감사함이 있습니까? 그리고 부르신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붙들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자연히 우리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온전히 쓰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들이 말로써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선한 것을 분별하며 살아감으로써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기도하기를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사랑의 지식과 총명이 풍성하여 선한 것을 분별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날에 진실하며 허물이 없는 신자로서 의의 열매가 가득한 자로 서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삶은 결코 몇 십년 살다가 끝마치는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착한 일을 시작하지 않는 불신자들의 삶은 물론 몇 십년 살다가 끝나버리는 의미 없는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불러낸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날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의의 열매가 맺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일을 알고 있는 신자라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간절함이 여러분의 간절함이 되어서 여러분의 삶에서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삶에 대한 관심을 여기에 두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선한 것이 증거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일의 도구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성도의 진실함과 허물없음은 자기를 내어버림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어버린 자로 하나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에서 진심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