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4  복음을 위한 삶


신앙은 지식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정당하고 바르다고 해서 그의 신앙 역시 바르고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착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이 옳다고 여겨지면 그 사람의 신앙까지 옳을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옳다고 해서 그의 신앙까지 옳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타인의 신앙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한 참고사항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한 의도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한다고 해도 비록 말은 옳을지언정 우리의 삶은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자주 언급한 말이지만 삶은 앎을 확증하는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앎과 삶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앎을 따라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이 진리이고 생명이고 복음이라면 삶은 앎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앎과 삶이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결국 자신도 자신의 앎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을 여러분이 믿지 못한다면 아무리 옳은 말을 했다 한들 그 말 때문에 옳다는 판단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앎이 정당하다고 해서 정당한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체가 정당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이 옳은가?를 살피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나의 앎을 따라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확증되지 못하는 앎이라면 그것은 단지 지식으로 머물러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안다는 것으로 다된 것이 아니고, 바른 말을 했다는 것으로 다된 것이 아니라 알고 있고 바르게 말했다면 그것을 확증하고 증거하는 삶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앎과 삶의 일치, 이것으로 신자됨이 드러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성경을 대하고 설교를 들을 때 ‘안다’는 것으로 외면해 버릴 수 없음을 알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성경을 대하고 설교를 듣는 것은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설교를 듣는다면 교회는 단지 성경학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내용이 정당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는 삶 역시 정당한가를 물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입으로 내뱉는 말에 의해서 여러분이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앎은 단지 지식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울의 기도 역시 이러한 방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대신 담당하게 하신 것’이라고 했을 때, 이 사랑이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신자의 마음에 머물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복종하게 하신다면 그는 자신에게 죄를 행한 누군가가 있을 때 그의 죄를 보지 않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희생을 볼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그를 복종케 함으로 맺어지는 용서라는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바울이 기도한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게 하사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해달라는 내용에 해당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분별이란 타인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이전에 먼저 내 자신이 지극히 선한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인가를 분별하는 것이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말한다면 사랑을 말하는 자신이 옳음을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를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분별을 위한 지식과 총명이 풍성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부터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자신의 성공일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주어진 삶인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다만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삶은 그 시작부터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신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에게 삶이 있고, 삶이 시작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생각할 수도 찾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았습니까? 본문을 다시 보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절)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로마의 옥에 갇힌 상황에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로마에 옥에 갇혀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자연히 바울을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그 마음은 옥에 갇힌 바울을 방문한 에바브라디도를 통해서 잘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형편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결코 육신이 시각에서 바라보지 말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분명 육신의 시각에서 본다면 바울의 당한 일은 불행입니다.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서글픈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당한 일을 육신의 시각에서 보지말고 복음이 전파되는 시각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결코 낙심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가 일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앎과 삶의 일치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볼 때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삶의 자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을 복음이 전파된다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결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앎에 대한 삶의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을 우리를 세상에서 성공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일하시는 든든한 후원자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배후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자신을 잘되게 하는 후원자라는 시각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때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그리스도는 여전히 우리의 배후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찾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상황은 분명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고초를 겪는 것이고 시련을 겪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대개 보여지는 반응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그러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가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복음의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을 위해서 있음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앎과 삶이 불일치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고초를 겪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가 가신 길은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 길로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자신의 삶이 편안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바램은 있다 할지라도 그 바램까지 그리스도로 인해서 포기되어지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의 바램을 따라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는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좇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삶 자체임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입술로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항상 보여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일 때 그의 삶이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거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좇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당한 일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당한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당한 일을 어떤 시각에서 대하느냐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을 바울의 말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바울의 말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시련과 고초들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바울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당한 일은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서 바울이 겪고 있는 고초를 봄으로서 나 역시 그리스도를 전파하면 바울과 같은 고초를 겪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멈추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3,14절의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오히려 바울의 매임으로 인해서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믿음은 여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모습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보는 것처럼, 바울과 같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역시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울과 같은 신뢰와 믿음으로 담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모습은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보이셨던 모습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고초와 시련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말씀할 것을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울에게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신뢰와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던 그 믿음이 바울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증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고 바울의 믿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 우리를 어떠한 모습으로 만들어가겠습니까? 우리가 신뢰하고 믿는 것이 바울과 동일한 것이라면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것 역시 바울과 동일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의 매인 것을 보면서도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언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염려했습니까? 바울이 자신이 당한 일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고 실망하면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의심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바울이 믿었던 것을 믿고 있다면, 바울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라면 바울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과 똑같은 일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바울과 같은 자세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고난과 죽으심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를 증거할 자로 세상에 남겨진 신자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겠습니까? 다른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이지 우리의 뜻대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아무렇게나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귀하게 쓰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삶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즉 세상에서 높임 받는 자 되는 것을 귀하게 쓰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만인으로부터 존경받고 칭찬 듣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쓰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예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아무렇게나 다루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르시고 아무렇게나 다루셨습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결국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당하는 일로 인해서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낙심해 버릴 것입니다. 남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고, 남들보다 적게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옥에 갇힌 바울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복음의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려고 하지 마시고 단지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시각에서만 바라보십시오. 인생에 대한 후회나 낙심은 사라지고 다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애통해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애통과 후회에서 여러분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서 궁중 안에 있는 온 시위대 안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여전히 전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복음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큰 손실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고 살고에 상관없이, 바울이 옥에 갇히고 자유롭게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복음은 하나님이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바울을 옥에 갇히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의 매임을 통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봤던 것입니다.



창세기 50:20절에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요셉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찾아온 형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의 형들은 시기심으로 인해서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 그로 인해서 요셉이 애매하게 애굽에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 모든 것이 요셉의 부모와 형들을 살리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삶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앎이 그의 삶에 머물러 있기에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삶으로 되어지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흔적이 무엇인가를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로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결코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신자의 삶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시고 항상 복음을 위한 삶으로 증거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