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18  바울의 기쁨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형편으로 인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이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형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형편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서 온 시위대 안과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보일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서 연약하던 형제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믿음이 감옥이라고 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을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쓰고 계시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되어지는 일에 기뻐할 수 있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을 보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가 당한 형편 자체를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형편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삶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계심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일의 도구로서 남겨진 것이 바로 우리들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울과 같은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같은 바울의 마음을 한가지 더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이 어떠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섭섭하고 욕을 한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나 역시 나를 욕한 사람을 욕하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조차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사는 사도였습니다. 사도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와 같은 모습이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바울과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본문의 바울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바울이니까’라는 말로서 본문을 회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바울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오늘 우리들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의 힘으로 그러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바울의 인격이고 바울만 받은 특별한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의 모습은 그리스도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 같은 믿음이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바울과 동일한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도 상관이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절의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말씀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15-17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보여지는 어떤 잘못된 성도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리기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투기와 분쟁에 대해 자세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도 바울에 대한 투기와 분쟁이 아니었느냐 입니다. 즉 바울을 의식하고 바울에 대한 투기로서 바울을 이기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는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어떤 일을 당했느냐가 아닙니다. 사도는 지금 자신이 당하는 일을 기초로 해서 편지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당하는 환경과 처지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과 일치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복음과 일치된 삶이 무엇인가를 자신이 처한 환경을 도구로 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바울은 자기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도구로 삼아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9-11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살펴봤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단순히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교회가 무엇을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교회가 무엇을 목표로 삼고 나아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바울이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말함으로써 복음이 무엇이며 신자의 행동은 결국 복음과 일치된 것으로 증거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는 하나 어떤 이는 사도 바울에 대한 투기와 분쟁으로, 즉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더욱 괴롭게 하기 위한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바울에 대한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입었음을 알고 바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좋지 못한 의도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런 감정이겠습니까? 아마 좋지 못한 의도에 대해서 책망하면서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러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나에 대한 경쟁과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좋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매우 힘들지 않겠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A라는 목사가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을 가르칩니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B라는 목사가 시기를 합니다. 그래서 A 목사를 이기기 위해서 B 목사 역시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A 목사에게 가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오도록 합니다. 이런 경우 A 목사는 B 목사에 대해서 욕을 하고 그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말을 보면 바울이 이런 경우였다면 ‘무슨 의도 무슨 뜻으로 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그것으로 기뻐하겠다’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내게로 오지 않고 다른 목사에게 가서 성경을 배운다고 해도 그리고 그 목사가 자신에 대한 시기와 경쟁으로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도 결국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것으로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복음과 일치된 행동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는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 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되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는 말을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이 말이 곧 생활과 복음이 일치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주보에 앎과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이 앎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 지식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앎과 삶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앎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은 항상 복음을 위해서 있습니다. 복음을 보여주고 복음을 변명하고 확증하는 도구로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우리가 말하는 복음에 일치된 모습으로 드러나지를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이 처한 상황과 주어진 일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과 일치된 삶으로 증거될 것인가를 고민하며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신자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변명하는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세 번이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15절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는 말을 하고, 17절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는 말을 하고, 18절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바울의 인생 전부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을 기회로 해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고자하는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그것으로 기뻐하겠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의도와 목적이라고 해도 결국 그들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그것이 바울에게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애당초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순전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만이 바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오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로 간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빌미는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누구에게 가느냐보다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느냐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보여주는 복음과 일치된 모습인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되든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지는 것으로 기뻐해야 하는 사람이 곧 신자인 것입니다. 때로는 정당하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과연 복음과 일치 된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자신을 보지 않는 것, 오직 그리스도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복음에 일치되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일에 분노하기  보다는 무엇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라면 행동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일 때 그것으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추구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그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드는가 들지 않는가? 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나와 어떤 관계인가를 불문하고 기뻐하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만을 보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 자기 개인의 감정으로 그들을 대했다면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까지 좋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이 어떤 것임을 그 흔적이나마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복음에 일치하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항상 복음에 일치된 삶이 되어지기 위해서 싸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