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21  그리스도로 사는 삶


높은 신앙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신자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과 같은 분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수준에 이른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인간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믿음으로 여겨진다면 사도 바울의 믿음 역시 보통 인간은 따라가지도 못할 수준의 믿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21절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는 바울의 이 고백을 보면 바울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높은 수준의 바울의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연약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자칫 잘못하면 바울이 보여준 믿음의 수준은  바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여겨버리고 우리에게는 우리 수준의 믿음이 따로 있다는 생각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자체를 전혀 다른 수준의 사람으로 평가해서 바울에게서 보여진 믿음의 모습이 어떤 것이든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믿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믿음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머물러 버린다면 결국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얘기는 하나의 위인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자신에 대한 욕망은 철저히 포기하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의아해 할 정도로 바울의 믿음은 참으로 순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사도 바울이 지금의 우리들처럼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날마다 갈등하며 헤매면서 겨우겨우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지탱해 가는 모습이었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편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바울이 그러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믿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깊은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도 그랬는데 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믿음은 단지 바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거리가 먼 높은 수준의 이야기로 치부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바울은 애당초 죄인이 아니었습니까? 믿음에 대해서는 우리와는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 ‘바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 우리 역시 바울과 같은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은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울을 바울 되게 했던 그 능력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했던 그 능력이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 한다면 그는 바울과 같은 믿음을 보일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능력이 아닌 것을 주님의 능력이라 하지말고 참된 주의 능력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제대로 깨닫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를 믿는 신자는 핍박하고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당시 바울 앞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장 앞장섰을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붙들린 예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바울의 재능이 아니고, 바울의 노력도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기 믿음을 위해서 애썼다는 얘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은 바로 주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주님의 능력은 전혀 쇠퇴하지 않고 지금도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가 ‘이것이 진정한 주님의 능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바울에게서 보여진 그러한 믿음의 모습이라면 그가 바로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신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에게서 보여진 믿음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참된 주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바울에 대한 시기와 다툼과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반응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그들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야 한다는 간절함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좀처럼 이해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참 대단하다라고 하면서도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그러한 생각은 믿음을 자신이 해야 할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라면 ‘내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는 생각보다는 ‘이것이 주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이켜 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는 말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했던 사도 바울이 구원에 이른다는 미래에 대한 기쁨까지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기쁨을 자신의 힘으로 이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었기 때문에 역시 계속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간구’ 즉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는 빌립보 성도들의 간구도 함께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돼서 바울이 구원에 이른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기도가 효능이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를 언급한 것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처럼 그들 역시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는 교제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을 기도한다면 그것 역시 바울과 같은 마음, 즉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 때문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통해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뜻에 응답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것에 서로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모든 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0절에서도 나타납니다. 20절을 보면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아마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말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한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보다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말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의 입에서든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온다면 그 고백 앞에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고백을 한 사람 앞에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에게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바울 스스로 한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 사람입니다. 그가 한 말은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의 바울이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의 도우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고 도우시는 성령님에게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지고 있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이루어지는 근거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어떤 일에서든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되어지는 것도 역시 성령의 도우심임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그리스도를 향해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라면 옥에 갇힌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까? 현재의 형편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는 것입니까? 만약 바울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여졌다면 바울이 말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옥에서도 변함 없이 그리스도를 향한 기대와 소망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전과 같이’ 즉 옥에 갇히기 전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것처럼 옥에 갇힌 현재에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란다는 이 말도 역시 현재의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고 옥에서 풀려나든 아니면 사형을 당하든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에 성령이 도우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옥에서 풀려나도록 성령이 도우실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램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말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부끄럽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다만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바울을 돕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옥에서 풀려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앞서 말한대로 바울 자체를 우리와는 전혀 다른 구조의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되버립니다. 결국 바울이니까 그러한 믿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령이 도우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울의 위대함에 묻혀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본다면, 그리고 그에게도 옥에서 풀려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문과 같은 고백을 한다는 것은 바울을 도우시는 성령이 자신이 옥에서 나오기 위해서 간구하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을 바울의 것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의 것으로 보는 시각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바울을 도우신 성령이 오늘 우리를 도우신다면 우리가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고 해도 결코 우리 자신이 어려움에서 해방되기를 간구하기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도우심이며 능력입니다.



우리의 말을 강제로 막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자로서 어려움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인가를 깨닫게 하심으로서 자신을 위한 간구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면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서 스스로 자기를 위한 간구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이 날 위해 간구하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하신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성령님을 통해서 바울을 계속 도우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성령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성령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어려움에서 해방시키고 편안함으로 인도하기를 도우실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십시오,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생각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가는 증거는 본문에서 보여지는 바울을 통해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그 형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려움 때문에 흔들릴 수 있는 자신에 대해서 염려하며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는 그 마음에 여러분 안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이 여러분을 도우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기쁨입니다.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포기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바울의 말하고 있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삶을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바울을 볼 때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본문의 내용들을,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보여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간절함을 단지 바울만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바울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면 결국 바울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바울의 얘기는 단지 바울만의 얘기로 그쳐버릴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바울 같은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바울 같은 분은 보통 사람보다는 더 신령하다는 생각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현대 교회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대표적인 예로 목사와 성도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신령한 사람으로, 그리고 목사 아닌 성도는 덜 신령한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그래서 신령하다고 여기는 목사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보다는 나보다 더 신령한 사람의 기도를 더 많이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러한 구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역의 차이일 뿐, 성도 자체를 구별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경험한 것은 오늘 우리들의 경험이 되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바울의 삶이 뭔가 우리에게 부담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애당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여러분은 다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은총에 감사함을 가지고 산다고 합시다. 인간은 죄인이며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자라는 것도 알고 있고 또 고백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지워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들도 하나하나 지워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뭐가 남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혹 우리의 말들이 말에 머무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생각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말들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의의 열매로 보여지고 있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을 지워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지워버릴 때 과연 남는 열매가 무엇인가를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입술과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말과 생각은 옥에 갇힌 현실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일에 열심입니다. 복음성가를 부르고 교회의 행사에 빠지지 않고 부지런히 전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통해서 나름대로 기쁨을 얻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물론 저는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이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한 믿음의 위험성은 행위 자체가 사라졌을 때의 반응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가 있을 때에는 기뻐하지만 행위가 없을 때에는 실망하게 됩니다. 가령 병이라고 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행위가 있을 때 가졌던 그 마음이 그대로 존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모습일까요?



바울은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병이 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면 과연 건강하게 복음을 전할 때의 그 마음이 변할까요? 분명 본문의 그 바울이라면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힘입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건강하든 병들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데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바울에게는 몇 년을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롭게 사느냐 옥에 갇혀 있느냐도 중요한게 아니었습니다. 부자로 사느냐 가난한 자로 사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단 하나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 이것만이 바울의 삶의 의미였습니다. 건강하든 병들었든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하신 바울에게서 보여지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매이게 된 것은, 하늘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신비한 경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자신이 핍박했던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울의 삶을 오직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안다고 하고 그리스도께서 알 위해 죽으심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서는 바울과 같은 삶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혹 단지 알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맺어지는 열매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열심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바울의 삶이었다면, 오늘 우리도 그러한 삶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되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열심이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