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4  사는 것과 죽은 것


히 2:15절에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어떠한지, 그리고 일생동안 인간이 죽음과 어떤 관계에서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죽음에 대해서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생을 죽음이라는 권세에 붙들려서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삶의 마지막이며 종착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죽음 후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그러한 세계가 있는지 조차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자기 존재의 사라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죽음이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시작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끝이 아니며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고, 그 새로운 세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고 그 세계를 소망하는 사람으로 살았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긴 자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히 2:15절의 말씀에서는 죽음에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기 위해서, 즉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보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에게서 현실에 대한 희망이나 보장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로 인한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 즉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가 아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새로운 세계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소망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는 현실에 매어 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현실에 매어 산다면 그는 현실이 전부이기 때문에 현실로부터의 단절을 가져오는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연약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초월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인만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종교적 소망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신자의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자됨의 증표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삶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새로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고 있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확고하기에 자연히 죽음이 끝이 아니며, 새로운 나라의 소망이 현실에 대한 소망을 극복하기에 현실과의 단절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사는 것이 신자의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고, 또 신자의 증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며, 신자 됨의 증표 역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망이 굳건한 신자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는 천국을 말하고 천국을 소망하라고 가르치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람들 자체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죽음에 대해 말하면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천국에 대한 설교도 인기가 없다고 말하는 시대에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설교자로서는 큰 모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죽는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이었습니다. 죽음은 곧 새로운 만남을 가져다주는 통로였기 때문에 이분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서로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서 살았던 삶으로서 할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그분과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이 죽음이었기에 그분에게는 죽는 것조차도 커다란 유익이었습니다.



21절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태도는 현대인들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는 것을 유익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죽음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23절에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욕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힘께 거하게 되는 죽음이 오히려 유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욕망이 성취되는 순간이 몸을 벗어버리는 죽음이기에 그러한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현대인들에게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는 그리스도에게 미친 광신자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을 불행으로 여기고 죽음을 회피하기를 원하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사도 바울은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기에 세상의 기준으로는 비정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미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정신과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을 광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광신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어느 하나에 미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고, 헛되지 않은 것은 오직 하늘의 것이며 그리스도가 그것을 주시는 분임을 알았기에 헛되지 않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천국을 말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며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죽음을 언급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천국은 몸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라면 하루속히 몸을 벗는 그 날을 기다리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소망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 자체까지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인식을 오히려 유익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을 얻게 하는 능력이 바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죽음에 대한 바울의 놀라운 태도 역시 바울이니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지 마시고, 바울에게 주어진 믿음의 능력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능력이라면, 바울과 동일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오늘날 신자들에게서도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모습이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 바울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앙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약속되어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단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늘나라로만 인식할 뿐, 그 나라에 대한 욕망과 갈급함보다는 현실 세계에 대한 욕망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현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두려운 마음을 감출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세상은 단지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장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나그네로 거하는 것이 곧 바울이 머무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나그네로 산 세상을 떠나서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죽음은 잠시 거하던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일 뿐, 인생의 끝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기 욕망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가벼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이루기를 원하는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마음의 짐들이 너무 무겁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욕망, 자녀에 대한 욕망, 하나하나가 이루고 싶은 것들 뿐입니다. 언제나 남보다 많이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자신의 불행을 느끼고 삽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 마음이 평안을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바로 세상에 대한 이 집착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합니다. 세상의 헛됨을 깨닫게 합니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큰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의 일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고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고 산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음을 마음 깊이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없어도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으로 감사할 줄 알게 합니다. 비록 남보다 가진 것은 없고 이룬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으로 장차 주어진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음을 알게 하십니다. 때문에 현실에서 실망하지 않게 하시고 내세로 인해서 현실의 어려움까지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거하는 것보다는 육신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평안에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몸을 벗고 그리스도와의 평안에 들어가는 죽음이 두려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의 능력이며 믿음의 열매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이기에 가능한 것이며 그리스도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이러한 믿음의 능력에서 마음에 멀어져 있는 것입니까? 왜 믿음의 열매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믿음은 우리의 삶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희망사항으로 머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나를 붙들어서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는 마음보다는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원하기보다는 이 세상을 원하는 것이고 세상을 원하기에 자연히 죽음이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가면서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말하는 것은 삶과 내세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바르게 삶으로서 좋은 내세를 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가 말하는 내세는 바로 이런 수준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산 대가로 좋은 내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세상 종교이지만, 기독교에서의 내세는 결코 상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교회를 다니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 대가로 들어가는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이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만 믿음의 껍데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왜 천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천국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힘들게 산 대가로서 좋은 천국을 원합니까? 단지 고생하는 것이 없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로서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까? 그러한 천국은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이들에게 천국이 좋은 이유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생각합니다. 보석으로 치장되고 금으로 세워지고 근심 걱정이 없는 곳으로서 천국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원하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을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살았고, 때문에 죽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유익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됩니까 아니면 죽음을 유익된 것으로 믿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됩니까? 사실 이 둘은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유익된 것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또 죽음을 유익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었기 때문에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익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이것부터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호주머니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심심할 때 꺼내서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다시 집어넣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이유가 모두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연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선택했기 때문에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그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희생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이며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믿음에서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섬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로 살게 된 그 이유나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미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은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이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삶의 이유를 오직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사는 이유,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는 이 말이 곧 우리 자신의 말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다만 생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쉬고 있을 뿐이지 생명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그가 바로 참된 생명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본문이 사도 바울이 말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1-24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즉 사는 것보다 오히려 죽는 것을 더 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살아있는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유익한 이유가 그리스도 때문이었던 바울에게는 사는 이유도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는 것도 자신이 의지와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고 싶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목숨을 유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세상 그 누가 자신의 힘으로 자기 목숨을 유지하겠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몸속에서 피가 흐르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은 스스로 사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우리를 살게 하신 분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지만,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일하신 일의 열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육신으로 살게 하실지 아니면 육신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 주실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의 성도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육신으로 거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 더욱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육신으로 사는 것이 누구의 유익을 위해서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바울을 대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대단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바울의 대단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으로 살고 있다면 여러분을 이용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일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은 비록 그것을 인정할지언정 우리의 삶이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내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심으로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의 삶, 인생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가 븥들렸고 지금 살아있는 이유도 모두 그것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바울의 고백에 진심으로 마음 깊이 동참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러한 삶이 되어지기를 소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죽는 것이 왜 유익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가 소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겠습니까?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천국이고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소원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소원했던 그 욕망은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과 일치되어 증거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십니까? 천국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나라임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자답게 죽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진심이라면 여러분에게서는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의 흔적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며 그리스도로 사시고 죽는 것도 그리스도 때문에 유익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