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28  복음에 합당하게


롬 13:14절에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갈 3:27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듣기에는 뭔가 좋은 말씀처럼 들리지만 사실 추상적인 개념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말씀의 중심을 놓쳐 버리고 추상으로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그분으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문자대로 한다면 현실에 사는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에 계신 분으로 옷 입으라고 말씀을 하니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냥 좋은 말이라는 느낌으로 끝나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우리들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와 합하여 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세례라고 말할 때 이 세례는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와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옷이란 그 사람의 행동을 다스리는 기능이 있습니다. 남자라면 많이 겪은 일이지만, 사람이 신사복을 입었을 때와 예비군복을 입었을 때의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신사복을 입었을 때는 주위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에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예비군복을 입으면 그러한 제약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주위 사람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연히 옷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함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서 그 옷에 어울리게 살아갈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즉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그리스로 옷 입고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다는 것은 복음에 맞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에 어울리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신자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람, 즉 신자는 자기 구원을 위해 있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세움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살아가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복음에 합당하지 않게 생활한다면 그것은 신자로서의 직무를 포기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로서의 직무, 즉 사명을 전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것이 신자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해하는 것은 증인이 된다는 것을 전도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을 찾아가 예수 믿을 것을 권유하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그러나 증인이란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증인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인데, 이것은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말하는 복음과 그리스도에 어울리게 살아감으로서 자연히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두고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뭘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인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 여러분이 믿고 있는 복음을 따라가는 삶이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 있으면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을 합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그들의 기쁨을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유익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25-26절에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을 함으로서 바울의 삶의 모습은 바울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의 성도들에게서도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옥에 갇힌 것이나 옥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한 말들이 사도 한 개인의 믿음의 삶을 소개하고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교회에 편지한 것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복음을 아는 교회가 복음에 어울리는 교회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교회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랑이 아니라 사도가 알고 있는 복음에 어울리는 삶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말함으로써 교회를 복음의 능력이 있는 삶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개인의 이야기는 결코 개인의 경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일하시는 흔적과 능력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상황 하나하나는 바울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복음과 일치되고 합당한 것인가를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너희도 이런 상황에서는 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마땅함을 권고하고자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나 빌립보의 성도들이나 동일하게 한 성령 아래 있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 아래에서, 한 믿음으로 산다면 각기 다른 모습이 아닌 동일한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에 일치하지 못하고, 복음에 어울리지 않는 방향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로 다스림 받으며 스스로 말하는 그리스도에 일치되는 것을 방향으로 삼고 달려가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그리스도의 낮아짐으로 인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 유익을 얻었다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신자는 분명 낮아지신 그리스도에 어울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낮아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되는 것으로 알고 낮아짐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가 바로 진정한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복음에 일치된 합당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았음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낮아짐이 아닌 높아짐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가 말하는 낮아짐은 무엇입니까? 자신은 빠져 버린 그리스도의 낮아짐으로 그쳐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자기 구원에 이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복음을 말한다고 자부하는 교회는 우리가 복음을 말한다는 것으로 자족할 것이 아니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가에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로는 자랑하고 인정하는 복음을 삶으로 거부하고 부인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면,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면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었다’는 고백은 죽지 않은 자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에서는 팔팔하게 살아있으면서도 입술에서는 얼마든지 죽은 자의 모습을 가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사도의 이 한마디가 지금껏 말에 머물며 스스로의 믿음을 인정했던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활을 복음에 참여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참된 모습은 신자가 복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의 말보다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더 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말할 때 어쩌면 행동 하나하나를 생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생각하면서 그러한 것을 복음에 합당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도 시기나 분쟁 다툼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시기하지 않는 성도가 되라는 것이 아니고, 분쟁하지 않는 성도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들이 과연 복음에 맞는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윤리와 도덕적인 행동을 의도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복음이 윤리와 도덕입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윤리와 도덕이 기쁜 소식입니까? 기쁜 소식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서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낮은 자로 오신 그분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의가 없는 우리에게 한 의로서 오셨다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에게 어울리게 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삶은 ‘복음에 합당하게’사는 것이라기 보다는 세상이 살아가는 것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어울리게 살기보다는 세상에 어울리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어울리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이면서도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을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세상에 어울린 모습만을 보이게 되는 것은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자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으로 자리하지 못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빌 3: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 나라에 속한 거룩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세상에 보냄을 입은 것은 우리가 속한 하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믿음에 일치된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의 삶은 무엇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입니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을 우리들의 행동을 고치기 위해서 하는 말로 들으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의 행동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찾아내어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고침으로서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을 따라가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는 신자로서 복음이 말하는 바를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으로서 복음을 믿고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복음을 따라가는 삶이 된다면 행동은 자연히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복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복음에 매인 자로 살아간다면 복음의 능력에 의해서 복음과 조화된 삶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과연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얘기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런 말은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시끄러운 잡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 그 안에 그리스도로 살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향해서 달려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권고하는 귀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귀한 분임을 믿는다면, 그 믿음과 일치하게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복음이 증거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