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30  싸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은사로서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믿음이 주어지면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믿음의 본질을 완전히 알았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고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믿음이 무엇인가를 실제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예로써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8:22-25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풍랑으로 인해서 배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는 ‘우리가 죽게되었다’고 다급하게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풍랑을 꾸짖으며 잠잠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책망을 하십니다. 이것을 마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로 기록하고 있고, 마가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기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르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누가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믿음의 행방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제자들이었다면 그 믿음은 풍랑이 있는 현장에서든 아니면 그보다 더 심한 위급한 상황에서든 보여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풍랑이 있는 현장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로서의 행동이 보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이 질문은 오늘 우리들을 향한 매일의 질문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구주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백으로 완성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을 하고 믿고 있으니까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을 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을 하심으로써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은 자라는 것이 틀림없다면 여러분은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문제가 남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 단지 가만히 앉아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믿음을 받았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시작된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구세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가 바로 내게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배워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우는 의미로서의 배움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삶에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며 믿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실제 경험하면서 배워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져보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입으로 스스로 말하고 고백하는 믿음과 모순된 것들이 많이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을 두고 보자면 예수님으로부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책망을 듣기에 딱 좋은 데도 불구하고 단지 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자신을 믿음을 아는 자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라는 말씀은 우리가 말하는 복음에 어울리는 삶, 다시 말해서 복음으로 살아감으로써 복음이 보여지는 삶이 신자로서 정당한 삶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으로 인해서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면서 예수님에게 다급하게 외치는 것은 믿음에 합당한 모습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그 모습은 믿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곤란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불안하게 되고 두려움과 염려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있는 신앙인이라면 그러한 모습은 합당치 않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고, 또 믿음은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일로 인해서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 곧 믿음이 있는 증거이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1-13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야말로 바울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고백은 말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위급한 상황에서도 풍랑을 만난 제자들처럼 ‘내가 죽게되었나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말하면서 기뻐하는 것으로 증명되어진 것입니다.



본문 27-28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교회 일에 협력하는 것이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교회 일에 대한 협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교회 일에 대한 협력 자체가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은 복음의 신앙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아는 신자로서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임을 알고 복음으로 기뻐하고 복음으로 감사하다면, 복음에 대한 그 말과 고백이 진심이라면 그의 삶은 자연히 복음에 일치되는 방향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설사 자신에게 위협이 있게 되고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복음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복음을 알고 기뻐하는 신앙인으로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의 하나로써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인을 대적하는 자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살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부정 부패가 많습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복음의 신앙이 과연 부정 부패를 용납합니까? 물론 복음이 부정부패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복음이 있는 자리라면 그 결과로서 부정부패는 용납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정부패는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는 탐욕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인데 복음은 돈과 권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나라와 의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 부패를 요구하는 세계에서 단호히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곧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복음의 신앙을 말하는 사람은 될지언정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리가 먼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기대한 것은, 복음을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의 신앙에 협력하는 아름다운 교회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어떤 위협과 대적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복음의 위대함을 보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싸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삶은 ‘싸움’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복음에 협력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 세상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자로서 복음이 없는 세상의 사고방식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싸움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원하고 내세우는 것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요소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으로 신앙인이라면 이 갈등은 절대로 피할 수 없으며 없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교회는 세상과의 갈등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스스로 이 갈등을 회피해 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복음을 포기해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현대 교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난감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현대 교인들은 은혜를 자신의 ‘잘됨’으로 연결합니다. 은혜를 곧 축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은혜를 고난으로 연결하여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믿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회피하고자 하는 기대로 은혜를 말한다면 과연 그것을 은혜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후서 3:12절에서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 역시 현대 교회가 신앙에 대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기대하는 것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이 아니라 핍박이라고 말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 대가가 복이 아니라 핍박이라면 누가 과연 경건하게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들, 그리스도가 생명인 사람들, 그들만큼은 그 어떤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은 단지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경건이 윤리적 사고에서의 인격과 인품, 그리고 도덕적인 선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핍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과 높임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경건은 그리스도가 사셨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왜 이것이 핍박으로 다가오는지는 실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모순된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앙인으로써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서 직접 체험하고 배워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함으로써 배워 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목사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목사의 신앙은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것으로 끝나버릴 위험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이론과 학문은 극히 신앙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론과 학문은 오직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을 위한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이 교회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과 삶의 관계는 참으로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생계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충성을 망설이게 하고 위협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은 곧 ‘생계’ 자체입니다. 생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며, 생계에 위협이 되는 일은 피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 불법과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부정과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무엇을 따라서 선택을 하게 되는가를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과 생계에 도움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고 스스로 말하는 복음에 합당한 길을 선택하는지를 살핀다면 실로 우리의 이론은 철저하게 신앙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인데 실제 보여지는 것은 자기 중심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자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9절의 말씀대로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합니다. 자기를 위한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고난이란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의 유익과 생계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은 육체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고 가시관을 쓰는 육체적 아픔을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24절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이 이제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육체를 통해서 보여져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통을 우리도 똑같이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셨을 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유익과 생계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한 선택을 하셨던 것처럼 신자 역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세우기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게 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로서 가장 신자다움은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든 오직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싸움이며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일에서든,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어떤 직업과 신분에서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자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적당한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싸움을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30절에 보면 바울은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는 말을 합니다. 같은 싸움이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감으로 인해서 있을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이 싸움이 사도 바울 개인의 싸움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싸움에 동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빌립보 교회에도 같은 싸움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싸움은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는 바울 안에서 보고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생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그리스도로부터는 멀어지지 않는 싸움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없는 사람은 신앙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이론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론으로는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람인데 삶은 전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은 죽음도 막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며 복음의 위대함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능력과 위대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고난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8절을 다시 보면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구원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고난에서까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