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말하나 복음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자신의 복음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말하는 이 복음이야말로 진리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복음을 따라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복음을 기준으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복음의 옳고 그름을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오직 성경에 있을 뿐입니다. 복음으로 살았던 분들의 얘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들의 복음을 살펴보고 과연 우리의 복음의 내용이 그분들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준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그분들의 복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복음을 지식 싸움으로, 말싸움으로 몰고 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지식 싸움도 아니고 말싸움도 아닙니다. 누가 알고 있는 복음이 맞는 것이냐? 누가 말하는 성경이 맞는 것이냐?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이며 누가 알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이냐에 대한 싸움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삶이 내가 말하는 복음에 일치되어 있는가를 먼저 보지 않으면 그야말로 복음은 지식 싸움이고 말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복음을 외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도 없이 복음을 말하고, 예수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예수를 외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관심이 없이 십자가를 말합니다. 결국 예수 편에 서 있지 않으면서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과 상관없이 살면서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복음을 말하고 예수 십자가를 말하기에 신자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복음을 말하면 그것이 곧 지식 싸움, 말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고 그분의 삶이 곧 나의 삶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단지 예수라는 이름만 가지고 사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말로만 자신이 예수임을 증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으로 증거되는 것은 그분의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이 그분의 말과 일치되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단지 말싸움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예수님이 하시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예수님의 말과 삶 전체가 바리새인들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예수님의 삶이 나의 삶이 되는 것이 없이 예수님의 삶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생각이 아니며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 스스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긴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그분을 따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분의 말씀과 삶을 부인하는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말은 예수님을 믿지만 정작 사는 것은 그분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빠져 버린 믿음은 내용이 빠져 버린 모양을 가지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의 내용은 동일하지 않으며 복음을 맞게 말한다고 해서 그 역시 생명이 있는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당하게 되는 고난까지도 받아들일 때 그것이 곧 진정한 믿음일 것입니다. 고난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추구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일치한 삶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유익과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순종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그는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마땅합니까? 이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이러한 교회로 만들어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마음을 같이 한 교회, 뜻을 합하여 한 마음으로 모이는 교회, 다툼이 없는 교회,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교회,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사실 이러한 교회는 교회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세운 교회를 그러한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를 꿈꿉니다. 물론 그 내면에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아름다운 교회라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모습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찾아가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다님으로 인해서 자신의 종교적 기대를 충족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고, 또는 교회를 즐기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남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실망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분명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로 만들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 역시 인간의 의지와 인격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음을 품고 뜻을 합한다는 것 역시 우리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들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힘으로 그같은 모습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이 나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도로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으로 인한 고난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과 편함이 삶의 목적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자가 모인 교회에서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까? 만약 교회에 분쟁이 있고 다툼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복음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의 내용이 없기 때문에 분쟁이 보여지고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말하지만 그분의 낮아지심과 고난의 편에 서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분쟁이며 다툼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5-37절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이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요구한 것은 주의 우편과 좌편의 자리를 각각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몇 번이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세계를 오늘날 교회로 생각해 볼 때, 결국 교회가 자리 싸움을 하고 서로 더 높아지기 위해서 분쟁을 하고 다툼이 있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아예 관심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마가복음의 제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를 요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 10:38-40)입니다.



즉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자는 예수님이 마시는 잔, 즉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고난을 제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리고 고난 역시 예수님 자신만의 고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까지 계속 이어지는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고난의 잔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면 그것은 단지 육신의 고통을 받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높아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으로 모이는 교회에서 과연 분쟁이 보여지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분쟁과 다툼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이 말씀은 앞서 말한대로 마치 이상적인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만들어낼 열매가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실제 삶이 십자가의 정신에 일치되어 있다면 그 열매로서 보여지는 것이 바로 본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은 현재 우리에게 맺어진 열매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본문의 모습과 비교함으로써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지, 복음에 일치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낮아지심에 일치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의도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신자가 서로 권면하는 것, 사랑으로 위로하는 것, 성령으로 교제하는 것,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권면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 자비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라면 자연히 마음을 같이 하게 되고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여 무슨 일이든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않고 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과 자기 일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며 살아가는 열매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서로 다투고 분쟁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분쟁과 다툼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원인이 있습니다.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는 그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툼이 있게 하는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서로 다투게 하고 분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쉽다는 것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과 함께라면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일수가 있고, 어렵다는 것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한 마음을 품고 뜻을 합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혈연관계에 있는 가까운 친족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다면 그 의견에 동조하고 따르기는 쉽습니다. 그 의견이 타당하냐는 것은 둘째 문제고 단지 가까운 친족의 말이라는 것이 그 사람과 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편견을 가지고 있고 평소 가깝지 않은 사람의 의견이라면 우선 그 의견에 대해 동조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자존심 아닌 자존심을 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분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를 서로 다투게 하고 분쟁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이러한 정신이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다투고 분쟁하게 하는 결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편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 편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편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가문, 자기 교회를 먼저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유익이 되는 일보다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을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툼과 분쟁으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을 생각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 살고,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을 ‘허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려는 허영으로 인해서 다툼과 분쟁이 있게 되고 사람의 마음을 서로 분리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분쟁의 원인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권위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 권위를 스스로 세우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존심으로 인해서 다툼이 되고 분쟁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존심을 위한 허영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세우면서 자랑을 하게 하고 그 자랑으로 인해서 인간의 마음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 자랑이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높이려는 의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러한 것이야말로 스스로 낮아지신 길을 가신 그리스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단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쟁과 다툼이 없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인간으로서 구원 얻은 자가 되었으며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합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다툼과 허영으로 하는 것을 피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겸손은 의도적인 고개 숙임이 아니라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누구라 할지라도 나보다 낫다는 그 정신이야말로 참된 겸손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겸손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생각이야 남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 자체가 겸손의 마음에서 나오는 열매가 되어야 진심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곧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않고 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에서 다툼과 분쟁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사는 신자라면 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안에서 외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이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 누구도 나은 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높임을 받고 인격적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일컬음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리들의 허물을 보게 됩니다.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있는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되고, 내가 가진 것을 내세우면서 스스로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죄악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악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살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자연히 나는 그 누구에 비해서 결코 나은 자라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되어지는 겸손인 것입니다. 이 겸손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있을 뿐입니다. 겸손은 나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세우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혹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은혜를 아는 자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은혜를 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