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1  입으로 시인


성경을 읽는 자나 말하는 자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성경, 즉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남겨 놓으신 그 뜻을 따라서 읽어야 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원칙을 벗어난 채 성경을 대하게 되면 성경은 결국 인간중심으로 해석이 되고 이해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성경 본래의 의미를 벗어난 채 인간의 계명, 즉 신자 생활에 있어서 지켜야 할 규칙으로 탈바꿈되어 가르쳐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 전해지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현실은 성경 본래 의미에 충실하지 못한 채 무작정 신앙생활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신앙생활로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아니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이 옳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즉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신앙생활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우리의 삶이 신앙을 따라가고 있는가를 돌아볼 일입니다.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한글을 읽을 줄 알고 문장에 대한 이해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글과 문장으로 되어 있는 성경이지만 사람에게는 닫혀 있습니다. 즉 문장 이해력으로 이해되는 성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29:11)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5:4절에서도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말씀을 펴거나 보기에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성경은 봉한 책입니다. 닫혀 있는 책이며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에게는 닫혀 있는 책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말씀을 쉽게 대한다는 것부터가 말씀에 대한 잘못된 자세이며 세상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에 의한 문장 이해력을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마음이 멀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는 ‘이것은 아는 말씀이다’는 생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라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본문의 말씀을 대한다면 본문은 단순히 문장에 대한 이해력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물론 문장에 대한 이해력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성경은 결코 인간의 이해력에 의해서 그 뜻과 의미가 드러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성령의 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국어 공부가 필수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정한다 또는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는 ‘시인’이라는 단어의 뜻만 알면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되십니까? 혹시 신자는 자기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되심을 말해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외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말씀을 하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는 말을 합니다.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보면 단순히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정작 사도 바울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장 이해력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의 한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은 그 문장으로만 본다면 서로가 대치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가령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반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4:2),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11:6)는 말씀을 합니다. 분명 한분은 행위를 말하고 한분은 믿음만을 말합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말씀을 문장에 대한 이해력만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라는 말씀을 우리의 입술로 예수님이 주라는 사실을 고백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대로 이미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입술로 하나님을 시인하고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셨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는 것을 어떤 경우에든 우리의 입술은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가령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주위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식사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설사 한다고 해도 남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스쳐가듯 간단하게 하고 끝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입으로 주를 시인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은 신자가 식당에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식사 기도하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일까요? 물론 주위를 의식해서 때마다 하던 기도를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들어서 주를 시인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결국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면 이것은 결국 인간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다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성경이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높여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행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있었던 인간을 책망해 버립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생각해 볼 때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입으로 인정하고 말해야 하다는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입으로 시인하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해서 한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성경은 결코 한 구절만으로 그 의미를 결론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구절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말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전체를 가지고 하나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것을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더욱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여러분 역시 성경을 듣고 읽는 사람으로서 이 점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두는 한 구절을 문장에 대한 이해력만을 가지고 본다면 틀림없이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사도 바울이 무엇을 의도하고 말하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린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1절 한 절만 보기 전에 10절을 본다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는 말씀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입으로 시인하는 문제에 앞서 하늘에 있고 땅에 있고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1절에서 말하는 ‘모든 입으로’라는 말씀에서 ‘모든’은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은 모든 자들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은 자들만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말하기 전에 먼저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은 자인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외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없이 다만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지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자체를 책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것은 단지 말로서 주를 시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나오는 시인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 시인하는 문제에 앞서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떤 마음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이름이란 예수님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지고 존재하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예수님이 하늘에 가시고 안계신 지금 우리에게는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생활 행동 등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처럼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을 대대로 높이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에 행한 업적을 높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름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담겨 있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그 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8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마음과 그 일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음은 복종을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그 일에 대한 복종을 뜻하는 것입니다. 복종한다면 결국 복종한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을 의미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가 이해하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복종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신자는 하나님에 대해 복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이름도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귀하고 높은 이름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이기 때문에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무조건 높여야 한다는 맹목적인 높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그 마음과 일 자체가 높임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 그 누구도 예수의 이름보다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누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일에는 비할 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예수님의 그 행위만이 뛰어난 의가 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은 자는 그 이름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높이거나 의로 내세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그 마음과 행위만을 뛰어난 것으로 인정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무작정 높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과 행위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에게 복종하신 그 마음과 행위, 그것만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들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된 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의 이름에 복종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어떤 행위를 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 행하신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인간의 삶과 생활에 대한 규칙으로 바꾸어 말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을 높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행위는 결코 의가 없음을 고백할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것이고 높임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 것, 자신을 높이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신앙을 자신과 비교하지 않는 것, 결국 자신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입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다’는 것을 말한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입술로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말을 할 수 없는 분들은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신 분인데 말로서 예수님을 시인하라고 해놓고는 말을 못하게 하신다면 이것처럼 불공평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성경은 모든 이에게 공평합니다. 그래서 입으로 시인하라는 말씀 역시 말을 하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임을 아시겠습니까? 아예 말을 하지말고 입을 다물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말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마음과 행위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것이며 그 이름을 높이는 것이며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한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10절 11절의 마지막이 ‘꿇게 하시고’ ‘돌리게 하셨느니라’는 말로 끝나고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하시겠다는 의미로 하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우리에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 역시 인간은 스스로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지 않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자면 인간은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지만 결국 추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이며, 말로는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그 은혜를 입은 자신을 자랑하고 모든 것이 은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스스로 예수님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꿇게 하시고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우린 이것을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시니까 예수님을 높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냐는 것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과연 무엇으로 영광을 받으시느냐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요셉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이미 예수님이 하실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 자체를 높이는 것이 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것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의 행위가 너무 귀하고 높고 크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들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자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리게 위해서 애쓰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된 신자로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과 생각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되시는 분이기에 생각이나 삶이 우리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신 분이었다면 예수님의 겸손으로 살아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고 예수님을 시인한 자의 삶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시인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의 마음을 아신다면, 그리고 그 겸손 앞에 무릎을 꿇으신다면 예수님의 겸손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섬기고 희생하신 분이었다면 신자 역시 섬김과 희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입으로 하는 그 어떤 말도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분을 시인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행여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은 것은 없이 다만 예수를 입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 마음을 둘 때 가능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이름으로 우리 앞에 계시는 그분에게 모든 마음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