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14  구원을 이루라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시고 기도하십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은 끝이 아니며 시작입니다. 즉 믿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은혜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어떤 보답을 기대하시고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차원으로 여긴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두시고 그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믿음을 주셔야만 하시는 것입니까? 그냥 ‘이것이 내 뜻이니까 내 뜻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면 신자가 그 뜻을 열심히 이루면 안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2-13절)라는 말씀에서 여러분에게 의문이 될 수 있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아마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분명 이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이해와는 맞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구원은 분명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역시 선물이며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은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연약해서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을뿐더러 순종하려는 마음조차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을 1:6절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는 말씀으로 설명을 합니다. 즉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이해하자면 분명 우리에게 항상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로 들려집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항상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선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예수를 믿었다 해도 아직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항상 복종해야 하고 그것이 곧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사실 이 구절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서 그러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그러한 해석은 성경과는 맞지 않는 것임을 알기에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 난감해 하는 것입니다.



우선 분명한 사실은,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부분과 우리가 이루어야 할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은 전혀 없으며 오직 예수님 한분의 희생으로 완벽하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베소서 1: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또 2:8절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구원에는 미완성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채워야 할 부분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역시 구원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대해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풀어가야 할 문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진 구원을 또 다시 우리보고 이루라고 말씀하는 이 구절이 과연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이 말씀에서 한가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앞서 말씀한대로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부분이 있음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루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가 힘써서 점점 채워가고 달성해가고 만들어 가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이루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이루라는 것은 분명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루라’고 말씀한다면 그것은 너희가 할 일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무작정 종교적인 행위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종교적 행위로서의 이룸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3,14절을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씀을 ‘이루라’는 말 뒤에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본문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그야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루라’는 말씀은 분명 행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게 하시는 분이 따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즉 행하게 하시는 분이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다면 그 행함은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행하게 하시는 그분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에 대한 비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믿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자 만들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믿는 자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바로 이점을 놓쳐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믿음이 주어진 것이며 믿게 하신 것인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행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이루라는 말씀도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의미로서 ‘이루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내 힘으로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으니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뜻을 위해서 행한다는 것은 본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마음과는 반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던 본래의 소원을 버리게 하시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소원을 새롭게 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셨다는 것은, 성격이 좋은 성격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 소원하는 것 등이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예전에 내가 소원하고 생각하고 살던 것들은 모두가 땅의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어떠함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 결과로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에 원수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구원의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음을 알기에 이제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고, 자연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가기 위한 열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인해서 보여지는 열심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루라는 말에는 이룰 수 있는 자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루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룰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 속에 두는 것이고, 믿음을 주셔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게 되셨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며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여러분 안에 있게 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도 관심 없고 오직 우리들의 생각으로 우리를 위해 살려고 힘쓰는 자들이었습니다. 믿음 역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이용하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나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시고 다스리시는 결과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는 것은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행하라’ ‘이루라’는 말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항상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곧 신자로 사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시작을 의미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제 그 믿음으로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의 의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가 담겨 있는 말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자가 이루어야 할 것, 즉 하나님의 소원으로 행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말씀에 있습니다.



2:1-4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일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다툼이나 허영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 소원을 우리에게 두셨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마음은 이것을 이루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룰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서 마음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말씀입니다.



12절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은 앞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은 그가 이미 구원을 얻은 자임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얻었기에 또 다시 구원을 위해서 행하고 이루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된 자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항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부터 보여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심으로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에서 증거되는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소원을 둔 사람이라는 뜻이고, 하나님이 뜻을 두시고 행하게 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소원은 나를 위한 나의 생각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어야 합니다. 나의 의지와 나의 생각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힘쓰고 살게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힘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루라’는 말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 역시 구원에서 멀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행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시 성경이 말하는 있는 구원이 결코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은 이루지 못했을 때 자신에게 미칠 결과를 생각하고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경외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서 우리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들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린 대개 예수님의 은혜는 귀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은 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귀하다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생각나면 조금 흉내나 내면서 살면 사는 것이고 안되는 그만이다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 마음을 알게 되고, 또 그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귀한 것을 간직한 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마음이 희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소중함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두렵고 떨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이고, 상대적으로 내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은 항상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알기에 나의 생각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에 머물려고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부패한 내 생각과 내 마음에 머물며 살지 않을까 조심하고 살피게 되는 것, 이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신자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남기신 말은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모습을 보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안계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자신의 삶에 몰두고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조차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세우신 그 뜻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은 결코 포기되지 않습니다. 구원을 이루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책망하시고 징계하셔서라도 그를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붙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사람에게 매인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매인 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사람을 보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구원을 이루기를 힘쓰고, 바울이 옥에 갇혀서 자신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고 신자로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여러분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러분, 목사에게 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붙들리고 하나님에게 매인 분들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지 목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있든 없든 목사와 상관없이 여러분에게 참으로 귀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십시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겸손이 있기에 14절의 말씀처럼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나님에게 복종하신 것처럼, 이제 그분을 의지하는 신자로서 여러분 역시 하나님에게 복종하셔야 합니다. 그 복종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구원이 참으로 귀함을 알기에 구원을 가리는 것보다 구원을 드러낼 수 있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에 그 소원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능히 그러한 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 일을 시작하셨고 또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고 계십시다.  때문에 행하되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이루되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