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16 원망과 시비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루어집니다. 누구도 스스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것을 봐서 구원을 이루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는 행위와 연관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이 많은 신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구절이 ‘자기 스스로 이루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신자를 향해서 하는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신자 안에 함께 하시고 신자를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좋은 세상인 천국에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다면 그  능력의 흔적들이 삶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 또한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13절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에게 두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볼 때 구원을 얻은 신자에게는 분명 구원을 얻지 못한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삶이란 흔히 생각하는 행동 자체가 다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착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런 종류의 다른 삶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삶의 목표 자체가 다름을 뜻합니다. 15절을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신자에 대해서 구별의 의미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 세대에서 빛들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대로부터의 구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가 가는 길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가는 길은 따로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4: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별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를 피하여 도망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세대 속에서 그들이 가는 길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가는 빛으로 나타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리고 자기들의 힘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14절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씀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원망과 시비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할 이유는 신자는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서 이 세대에서 빛으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종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신다 할지라도 원망과 시비가 없이 그 일을 대하는 것으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소망과 탐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고 살아가지 않는 한 원망과 시비는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서 배우고, 내일 또 배우며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원망은 되어진 일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를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비는 되어진 일에 대해서 옳지 못하다고 나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원망과 시비는 스스로 소원하는 일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시비는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품꾼이 집주인에게 원망과 시비를 거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포도원의 주인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기로 하고 아침 일찍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또 다른 일꾼을 고용하고, 그 후에 또 다른 일꾼을 고용하고 일이 다 끝날 무렵인 오후 늦게 다시 일꾼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줍니다. 그러나 먼저 온 일꾼들이 주인의 처사를 원망하면서 시비를 합니다. 어찌하여 하루종일 일한 사람이나 나중에 와서 적게 일한 사람이나 품삯이 같냐는 것입니다.



늦게 온 일꾼의 입장에서 보면 집주인의 행위는 분명 은혜고 자비였습니다. 일한 것도 없이 다른 사람과 같은 삯을 받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일찍 온 품꾼들은 집주인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원망과 시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집주인이 어떻게 했을 때 그것을 은혜와 자비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연히 늦게 온 사람보다 더 많은 삯을 받았을 때 원망과 시비가 사라지게 되고 주인의 은혜와 자비함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원망과 시비는 자신이 기준 되어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가 원망과 시비의 이유입니다. 자기 스스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옳고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하셨을 때 원망과 시비를 하게 됩니다.



원망과 시비를 말할 때 우리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들을 왜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는지에 대해 시비를 합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면 다시 고기가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 밖에 있었던 것입니까? 분명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었습니다. 비록 광야라는 환경에서 몸은 고달플지 몰라도   망의 자리인 애굽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만족해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으면 또 다른 것을 원했습니다



.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원했기 때문에 원망과 시비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일이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 안하셔도 잘 살아갈 수 있는데 괜히 하나님이 끼어 들어서 우리를 귀찮게 한다는 식입니다.



혹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아닙니까?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안해도 될 일을 뭐하러 하셨느냐는 식으로 십자가를 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것을 인정은 하지만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습니까? 혹 이스라엘처럼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은 것을 인정을 하지만 별 의미 없는 일로 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이 베푸신 일이 우리에게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때 원망과 시비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3-14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고 행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우리의 소원으로 자리한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과 나의 소원이 일치된다면 원망과 시비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 개인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고,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빛들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우리 일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의 신앙에 방해물일 뿐입니다. 우리 일이 잘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일 뿐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의 뜻이 포기되어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만 볼 수 있는 빛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일이 잘될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원망과 시비를 드러낼 뿐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음에 대해서 불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여러분의 일이 하나님의 일과 연관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하나님이 도우셔서 잘되기를 바라는 여러분의 일들이 과연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 일이 잘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나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피해를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사업이 피해를 입어야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내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식이 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공평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덕분에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녀답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이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할 물을 얻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먹을 것을 얻지 못해서 굶주려 할 날들을 맞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는 원망과 시비의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씀드릴 때 어떤 분은 이 말에 대해서 이미 반발의 마음이 싹틀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원망과 시비가 없는 것도 어느 정도지 집안이 망하고 자식이 죽는 일이 있는데도 원망과 시비가 없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반발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입장이 되보라 그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라는 반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에게 여러분의 입장을 알고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물론 목사라는 인간으로서 여러분의 입장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씀은 여러분의 입장에 서서 증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입장을 내세우며 반발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시비하겠다는 자세를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어느 정도의 일에 대해서는 원망과 시비를 하지 않고 넘어가겠지만, 도에 지나치는 일이라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이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대한 신뢰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 위에 굳게 선 마음이라면 모든 일에서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신자를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해서 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흠없는 자녀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멸망 받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불려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하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생각하시고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굳게 하셔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지 원하는 것을 받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마시고 주어진 것으로 감사와 찬송을 드리십시오. 이러한 삶에서 원망과 시비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는 항상 받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세대입니다.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과 시비로 행하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러한 세대의 길에서 벗어난 자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세대에서 벗어난 길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저를 끝까지 의의 나라에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의의 나라는 내가 지켜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이 지키신 덕분으로 들어가게 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하심입니다.



세상에서의 고통은 잠시 잠간이지만 의의 나라에 거하지 못하는 것은 영원한 고통이기에 저로서는 세상에서의 고통이 나로 하여금 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붙들어 놓는 도구로 쓰여진다면 기꺼이 그 고통에 복종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의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어그러지고 거르신 이 세대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일하시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골고다로 인도하셨음에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과 같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진짜 좋은 일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시고 좋은 것을 받았은즉 그것으로 기뻐하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함으로서 이 세대에서 빛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