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16  흠없는 자녀


신자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없을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며, 복종이 없는 자는 신자라 말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 ‘나는 하나님께 복종하는가?’에 대해서 자문에 보십시오. 복종하십니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십니까? 사실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신앙인들을 바라보면서 많이 답답해하는 것 중 하나가 신앙생활이 교회라고 하는 집단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교회용으로 머물러 있는 신앙입니다. 교회안에서만 쓰여지는 신앙일 뿐,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개인적으로 세상을 대하며 살아가는 삶에서는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돈 버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인데 교회 밖에서는 그러한 신분들은 몽땅 감추어 버리고 다만 돈버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국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가는 셈이 됩니다. 즉 교회와 세상이라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신앙인이라는 신분으로 존재하고, 교회밖으로 나가면 신앙인이라는 신분은 벗어 던지고 어느새 세상과 똑같은 돈 버는 사람이라는 신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과연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신자라 하면서도 관심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아니라 온통 자기 삶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신앙인으로 살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단지 교회를 다니는 교인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속마음을 솔직히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교회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어디에서든 언제든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합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신앙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살아계시는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한정된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전체에 살아 계시고, 삶의 전부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배후에 계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생각하며, 주어진 일이 자신에게 나쁜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시비하고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를 택하여 이 일이 있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 이 곧 복종입니다. 신자에게는 바로 이러한 복종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복종은 곧 세상에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으로서 신자의 삶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원망과 시비 없이 복종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의 복종은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종 자체가 다스림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것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망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나를 다스리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신자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다움’을 말할 때 대개 생각하는 것은 ‘착한 행동’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는 세상이 볼 때는 하나의 종교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종교인에 대해서 ‘착해야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인 자체를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따라서 종교인이면서 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는 그가 가진 종교 자체를 비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착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지만, 신자다움을 세상이 생각하는 그런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결국 신자다움에 대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자답게 보이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려고 힘쓰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착해야 하고, 신자는 곧 착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모든 착한 사람은 신자라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신앙과 상관없이 착하게 살고, 또 착하게 살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착함을 보고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지 우리들의 행위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을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흠이 없고, 순전하여, 흠없는 자녀로, 빛들로 나타내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흠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마 흠이 없다는 것을 행동에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타인에게 비난받을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흠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순전하다’는 것 역시 이러한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어그러지고 거스린 세대에 흠없고 순전하라는 말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행동을 함으로서 칭찬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흠없고 순전한 자녀로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흠없고 순전하다는 것은 행동에 잘못됨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신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안하는 순전한 사람이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없는 순전한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 흠이 없는 것과 하나님이 보실 때 흠이 없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세상인으로서 흠이 없다고 여길 수 있는 기준은 분명 도덕과 윤리를 기준으로 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 행동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전혀 잘못됨이 없는 것이라면 흠이 없다는 판단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런 의미에서 흠이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흠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하나님께로부터도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인정받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 해서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이 없고 순전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흠이 없고 순전한 것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이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흠이 없는 것을 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흠없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흠없는 자로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흠없음은 곧 사람에 대해서 흠없음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거룩과 흠없음은 사람앞에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과 흠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사랑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없게 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거룩한 것이며 무엇이 흠없는 것인가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사랑안에서라는 말을 먼저 이해함으로서 그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택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보시고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자각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안에서 흠없는 것은 사랑을 사랑으로 아는 자를 말하는 것인데, 이가 바로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것은 그 행위가 거룩하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마음 깊이 깨닫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당초 인간의 행위를 두고 흠없음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기대를 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에 기대를 두셨다면 인간 행위를 고치시기 위해서 노력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 기대 걸지 않으시고 포기하셨다는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흠없음은 행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흠없는 신자다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 흠없는 신자다움은 잘못됨이 없는 착한 행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흠없는 신자다움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허물과 죄를 아는 것이 바로 순전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신자가 자신의 허물을 아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흠없고 순전한 자녀로 선 것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빛들로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모습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흠없는 자녀로 세우신 것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모든 세대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피조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이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과 재주와 힘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이러한 세대에서 흠없는 자녀로 세워지고, 빛들로 나타나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곧 복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뢰하기에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에게 어떤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고 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원망과 시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심각한 일이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그 일을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복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대에서 빛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을 때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고 말합니다. 어둠이 빛을 빛으로 깨닫지 못한 것은 스스로 빛의 존재가 필요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 스스로 자신들을 빛으로 여겼기에 또 다른 빛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빛이 왔으되 빛으로 여기지도 않고 빛이 빛인 줄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스스로 빛으로 살아갑니다.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히 얼마든지 빛을 비출 수가 있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세대에서 빛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빛으로 사는 세상은, 자기 스스로 의의 길을 가며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흠없는 자녀는 자신의 허물과 죄인 됨을 알기에 자신의 모든 길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시 139:23-24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 다윗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 역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마음을 아시기를 바라고, 자기 뜻을 알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과 뜻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불의한 마음과 뜻이라면 자신을 책망해서라도 영원한 의의 길로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흠없는 자녀의 순전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복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삶을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떠나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세대처럼 자신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사는 것에 몰두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 관심을 두는가를 생각해보자는 말씀을 먼저 드렸던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신자로서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 자연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스스로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다움은 우리 스스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류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신자 안에서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오심의 의미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신자는 그때부터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이 일에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신자는 배운 것을 그대로 토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배운대로만 행동하고 시킨대로만 움직이는 기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13절의 마지막에 보면 ‘행하게 하신다’라는 말을 합니다. 행하게 하신다는 것은, 행하는 자는 우리지만 행하게 하는 분은 따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킨대로 기계적으로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고 결정하고 반응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흠없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신자는 생각하는 것도, 마음먹는 것도, 결정하는 것도, 어떤 일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도, 생명이 없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반응하시고 대하시듯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내 일을 생각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내 유익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은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시킨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성령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서 여전히 나의 삶에 머물러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6절에 보면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흠없는 자녀로 빛들로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다른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즉 세상속에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는 것에는 사실 뒷전에 물러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말씀을 밝히는 도구로 쓰여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나에게 즐겁고, 나에게 편하면 최고로 여기는 삶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으면 즐겁고 없으면 낙심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흠없는 자녀로 세우사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데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고 순전한 자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자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한 삶을 살려고 한다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데로 인도되고 있으며 이 일을 위해서 사랑으로 죄와 허물에서 건짐 받았음을 안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며 흠없는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