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21  신자가 구할 일


창세기 1:26-2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냥 흙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앞서 말씀드린 창세기 1:26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즉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은, 결코 인간을 세상 만물보다 가치있는 존재, 즉 흔히 말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자는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 가장 뛰어난 피조물을 만드시기 위해서 특별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분명한 이유는 사람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일이 바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탄에 의해서 자기 일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5-6절에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는 말씀을 합니다. 사탄의 말에 의해서 여자는 ‘먹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먹으면 지혜가 있게 되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나 자기 일을 구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자라면 그 삶의 방향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 광신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에 파묻힌 삶이 되라는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흔히 교회가 ‘교회 중심’이라는 표어를 내걸기를 좋아하지만 ‘교회 중심’이라는 표어는 자칫 잘못하면 신자의 가정보다는 교회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의 삶은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교회 중심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향하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많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산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실 신자가 이러한 말을 많이 하고 들으면서도 무엇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인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노력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가고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고가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믿음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 아래 있게 하신 이 모든 일이 나 한 사람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예수님을 아는 신자 되게 하셔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로서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신앙에 있어서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을 ‘초신자’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초보적이다는 뜻일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모르고, 성경도 잘 모르고, 기독교 교리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르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야 할 사람이기에 ‘초신자’라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회를 10년 20년 다녔다고 할지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기도에 머물러 있다면 그가 바로 기도가 무엇인지 배워야 할 초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보다는 단지 자신이 속한 교회만을 본다면 그 역시도 교회에 대해서 배워야 할 초신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초신자는 교회에 몇 년을 다녔든, 또는 교회에서 어떤 직분에 있든 상관없이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믿음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사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신앙은 대개가 자신을 위한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구원을 위해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오심은 ‘자기 구원’이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 놓고 하늘로 가신 것이 예수님의 전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뭔가 다른 힘에 의해 예수님에게 붙들렸다는 인식을 전혀 가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것이 전부일 뿐, ‘예수님이 왜 나를 붙드시고 믿게 하셨는가?’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이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나오는 행함 역시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신앙이기에 행함 역시 자신을 위해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의 사고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날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고 날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자기로부터 출발한 신앙이기 때문에 결국 신앙 생활도 자기를 위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고 해도 역시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의 일을 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일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질 상급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초보적 수준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초보적인 신앙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6:1-2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는 말씀을 한 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 등의 모습들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행실을 회개하는 것을 버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버리라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죽은 자의 부활이나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히브리서에서 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신앙하고, 안수, 세례, 부활, 심판 등은 현대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점점 복잡해지고 읽기가 부담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부담스럽다고 해서 읽기를 포기하지 마시고 성경을 펼치고 제가 말씀드리는 바를 따라 하나하나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라고 해서 다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만 예수를 말하는 기독교인으로 머물러 있기보다는,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신앙인다운 신앙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면 인내하시면서 말씀이 말하는 바를 따라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현대의 신자들은 성경을 읽기는 읽되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고 ‘오늘 내가 할 일’을 찾는 소위 성경묵상은 하려고 하는데 성경에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찾아가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긴 목사들조차도 성경에 관심이 없는 시대이지 성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부산의 어떤 서점에 들렀을 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논문이나 책이 나온 것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때 서점 주인인 집사님이 말하기를 ‘앞으로 우리 서점에서 신학서적은 몰아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기독교 서점에서 신학서적을 몰아 낸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제 물음에 그 집사님이 대답하기를 신학서적을 봐야할 목사가 전혀 신학 책을 찾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가 신학에 대한 공부나 성경을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니 설교가 되어질 리가 있습니까? 결국 다른 사람의 설교를 표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터넷에 ‘뉴스 엔조이’라는 기독교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지금 목사의 설교 표절의 심각성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 예로 포항의 유명한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다른 유명한 교회의 목사 설교를 표절을 해서 설교를 했다가 자기 교회의 성도에게 그 사실이 드러나서 한동안 교회가 시끄러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설교를 보면서 그 사람의 성경 해석이 옳다고 여겨져 그의 해석을 따라가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당연합니다. 설교는 자존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 표절의 근본 원인이 목사로서 성경 연구를 게을리 함에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성경 연구가 꼭 목사의 몫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문으로 성경을 연구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 나름대로 성경을 깊이 상고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또 한편으로 성도가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목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사를 게을리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본 주제에 대해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말한 도의 초보를 버리는 문제를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 등이 버려야 할 도의 초보이며, 다시 닦지 말아야 할 교훈이냐는 것입니다.



역시 히브리서 4:10절에 보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일을 쉬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이 말씀을 본문에서 말하는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안식의 상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셨으니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의에 대해서든 행함에 대해서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즉 우리의 의가 부족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거나, 우리의 행함이 부족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는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의를 위해서 회개한다거나, 자신의 복을 위해서 기도한다거나. 자신의 병을 낫기 위해서 안수한다거나,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신앙한다거나, 자신을 위한 심판, 자신을 위한 부활 등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버려야 할 도의 초보란 자신을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회개를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회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의 초보입니다. 그리스도의 도는 우리를 위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신앙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보다는 날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라고 하신 것 역시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신앙 형태입니다.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도의 초보에 머문 수준이며 그리스도의 일보다는 자기 일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내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림으로써 자기 일을 구하는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제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15절에서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이유는 골로새서 3:10절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는 말씀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새사람을 입게 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좇아가게 하기 위함이고, 로마서 8: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미리 정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그 모든 일에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도의 초보일 뿐입니다.



20절에 보면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같은 뜻을 가지고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는 디모데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빌립보 교회의 사정보다는 자기 일을 더 구할 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음보다도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을 더 존귀한 것으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자신이 부름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사도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존귀하게 되고 높임 받기를 원하지 않는 그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2:6절부터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 것이 곧 자기 일을 구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자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것이 곧 우리의 사정을 진심으로 생각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이 마음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자기 일보다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생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의 일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우리가 그리스도부터 어떤 은혜를 입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합당한 존귀하게 여김 받기를 거절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본받아 그 분이 가신 길을 좇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진심으로 생각하신다면, 나의 언행이 형제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염두에 두며 행동하셔야 합니다.



신자는 자기 자존심과 체면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사람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새사람으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지혜를 갖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으로서 새사람의 삶이 보여져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 믿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물론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니 자비니 긍휼이니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죄인됨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보기를 게을리 한다면 결국 그 마음은 사랑과 은혜보다는 세상에서 자신을 유익되게 하고 자신을 잘되게 하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풍족함이 없는 마음이기에 자신의 풍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게 하신 형제까지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무시하는 것 자체가 곧 그리스도의 일을 무시하고 있음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무시하면서 교회의 열심인 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형제와 경쟁하며 일하는 것이 봉사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풍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는 자기 일을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지 마시고 하늘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풍족합니다. 우리가 나서서 더 채워야 할 것이 없을 정도로 풍족합니다. 이것을 안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안식이 없을 때 그리스도의 일보다 자기 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풍족함을 누리지 못하기에 풍족을 누리기 위해서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풍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세상에 있었다면 우리의 사정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서 동등 됨을 여기고자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섬기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늘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셨던 것이고, 그러기에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김 받고 높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신자 역시 이런 사람으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에베소서 2:6절에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신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은혜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또한 10절에서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새사람으로 새롭게 지으신 것은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의 본분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이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죄에서 건지시고 피로서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의 풍족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이미 풍족한 자는 안식에 거하는 사람이며, 그가 바로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