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30  함께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누구를 위하여 교회에 오시며, 누구를 위하여 헌금하시고,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십니까? 이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볼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은 너무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너무 벗어난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신앙에 몰두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셨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여러분의 구원이고, 구원은 곧 여러분 개인의 구원이 아니냐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 개인을 천국으로 부르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시고 그 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심을 두고 계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개인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자의 신앙은 한 개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가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 개인의 신앙이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또는 교회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개인을 천국으로 보내기 위한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주어진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연결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어져 간다는 것은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서로가 다듬어져야 하고 깎여져야 하는 훈련과 배움과 고통의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으로 모이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들을 염두에 두고 교회를 생각해 본다면, 교회에서 만나는 여러분의 형제들은 믿음으로 서로 연결되고 함께 지어져 감으로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져야 할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는데 많이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에게 서로 연결하여 함께 자라가고 지어져 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하고, 어쩌면 중요한 것으로 인식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신자로서의 덕목 정도로 인식할 뿐,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신자를 향한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까지는 생각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전도나 선교, 또는 교회 부흥이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혹 교회안에서 신자들의 관계에 대해 가르친다면 그것은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 때문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내기 위한 의도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살펴본다면 신자가 서로 모여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를 이루고, 이를 위해서 함께 지어져 가는 관계에 있어야 함은 믿음이 주어진 신자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개인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은사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인의 신앙은 개인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의도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채 오직 자신을 위한 신앙에 몰두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로 인해서 믿음이 서로 연결되어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는 몸의 관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에베소서의 말씀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는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그 삶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즉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되는 삶이었다면 그 위에 세워진 신자 역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와 선지자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믿음 역시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것이고 따라서 그 삶 역시 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되어지고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 역시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즉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믿음에 의해서 나와지는 것이라면 바울과 동일하게 믿음으로 사는 신자에게서 바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잊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주어지고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이루어야 할 것을 요구하시고, 구원을 주시고 구원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 있음을 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배우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요구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으로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요구하는 신자의 삶은 무엇입니까? 17-18절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관제’란 고대 제사 의식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물이 죽임을 당하고 신에게 바쳐지기 위해서 불에 태워질 때 포도주를 가져다가 제물 위에 부었던 것입니다. 결국 포도주는 제물로서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을 위해서 부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러한 관제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형편을 빌립보의 성도들이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이러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는 말로써 그들을 위로한 바도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든 중요한 것은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린다’는 말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기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삶을 포기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삶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쓰여지는 제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염려하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바로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약 바울이 감옥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이라는 귀한 제물 위에 부어지는 관제와 같은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바울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나의 삶은 여러분의 믿음이라는 제물과 봉사위에 부어지는 관제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죽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제는 불에 타는 제물 위에 부어짐으로서 사라져 버립니다. 오직 제물을 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관제로 비유하여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에 부어지는 포도주의 역할로 말하는 것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라는 의미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 자신이 관제로서 죽고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기쁨은 단지 ‘내가 믿음의 일을 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라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라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 어떤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울은 괘념치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라는 것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목숨보다는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은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진 열매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을 받은 신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음을 받은 자로 여기십니까? 어쩌면 바울과 비교해보니까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 때문에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음을 의심없이 믿는다면 분명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살리셨음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믿음이 있는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서는 보여지지 않는 것입니까?



바울의 삶은 믿음에 대한 복종이 결과입니다. 믿음에 대해 온전히 복종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로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바울을 닮은 삶이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라는 문제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가?’를 깨닫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 나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구나.’를 알았다는 것으로 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알았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고쳐져야 할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알게 된 것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되어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알았다’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알게 된 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것은, 알게 되고 깨닫게 된 것을 향해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게서 보여진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 우리가 생각할 때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수준 높은 신앙이라 해서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밀쳐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에베소서에서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웠다는 말씀처럼 지금 우리의 삶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기에 사도와 닮은 삶이 보여져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힘으로 그러한 삶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복종하기는커녕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을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만나시고 믿음을 주셔서 바울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복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시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실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이 곧 나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삶은 실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수준 높은 삶이라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기에 때문에 보통 사람인 나는 실천할 수 없다는 것으로 아예 처음부터 바울의 삶은 바울 개인의 것으로 돌려버리고 관심조차 두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19-22절에 보면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는 말로써 디모데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고자 한 것은, 오직 디모데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빌립보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은 디모데 역시 바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의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디모데를 바울은 ‘동역자’(롬 16:21)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바울에게는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만이 아니라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 우르바노(롬 16:9), 디도(고후 8:23), 빌레몬(몬 1:1),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몬 1:24) 등을 동역자로 일컫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는 것으로 바울에게는 모두가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바울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수고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주어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는 바울이 동역자로 말하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지금 우리가 말하는 평신도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도 얼마든지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바울에게 ‘동역자’인 것입니다. 바울에게만 동역자가 아니라 여러분 서로서로가 동역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한 수고로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역시 나의 형제요 함께 군사된 자(2:25)라고 말합니다. 26절에 보면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는 말을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병들었음을  빌립보의 성도들이 들은 것을 알고 심히 근심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병이 근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병으로 인해서 빌립보의 성도들이 근심할 것을 근심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1:8절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울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에바브로디도 역시 바울에게는 같은 그리스도의 군사요 동역자요 형제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누구의 일을 먼저 구합니까? 자기의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일입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우리 개인의 일을 먼저 구함으로써 무너지는 것은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은 너무 자기 일에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집착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묻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뜻을 같이 하여 빌립보 성도들을 진실히 생각할 사람이 디모데 밖에 없다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할 뿐,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저희가’라는 말이 누구를 가르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디모데외에는 모두가 자기 일을 구할 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일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일이 우선이고 자기 일을 구하기 때문에 형제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동역자란 목사가 같은 목사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동역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의 일을 구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먼저 구하고 살아간다면 우린 서로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입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된 사람들입니다. 우린 서로 이러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동역자’의 관계로 나타나야 할 우리들이 때로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욕하는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포기하고 자기 일을 구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명성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높음을 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들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연결되어야 할 관계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배우시고 이루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우시고 ‘동역자’로서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기 일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목사와 성도 역시 이것을 근거로 생각해야 합니다. 흔히 목사를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목사에게 순종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목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목사에게 동역자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일을 함으로써 ‘동역자’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자기 일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고 형제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에게도 이런 모습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우린 함께 복음을 위한 ‘동역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로 만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에게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일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구하기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배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배움이 없는 교회 생활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가치있는 신자의 삶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역자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돌아보시면서 믿음이 연결된 관계로 함께 자라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