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할례당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보면 지금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과거에 했던 같은 말을 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가르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바울에게서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또 다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는 안전한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같은 말이란 본문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들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언제 가르쳤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 가르쳤느냐가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말한 내용을 또 다시 말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입니다. 바울은 같은 내용을 또 다시 말하는 것에 대해서 내게는 수고로운 것이 아니며 너희에게는 안전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같은 말을 또 한다는 것은, 말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수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는 내용을 또 다시 반복해서 말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바울이 다른 할 말이 없어서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시 빌립보 교회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듣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한가지 염려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인한 관심의 상실입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들을 때 그 내용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자연히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힘든 것은 바로 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목사의 설교 내용은 거의 반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때문에 들었던 내용을 또 다시 듣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말한대로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 말씀에 대한 관심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의식해서 목사는  새로운 것을 말하려고 힘쓰기도 하지만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성경에서 의도하지 않은 다른 길을 가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많이 강조했던 말이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신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나 원칙에 대해서는 바르고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유혹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의 기본 원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있다고 할 때, 기독교인이라면 아마 누구나 이 원칙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이 말이 자신들의 귀에 들려질 경우 자연히 관심을 닫아 버리게 됩니다. 이미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그들의 관심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미 가르쳤던 내용들을 빌립보의 성도들이 다 잊어버렸다거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생활이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따라가는 것에서 위태롭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안전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 말씀을 머리로 듣지 마시고 삶으로 들으시라는 것입니다. 머리로 듣는다면 ‘안다 모른다’로 평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삶으로 듣는다면 ‘그렇게 살아가느냐 살아가지 않느냐’로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씀을 듣는 신자에게 있어서 크게 잘못된 것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원칙에 대해서는 다시 들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지식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으로 듣게 되면, ‘나는 과연 알고 있는 복음의 원칙을 따라 살아가는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삼가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가야 할 대상이 세 종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나 행악하는 자나 손 할례당은 모두 같은 부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삼가라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 곧 복음에 위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그들의 사고방식에 이끌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에 대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개’라는 것은 분명 욕이며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그러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삼가라고 말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성도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된 교사들이 가르치는 사고방식이 복음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개로 표현하고 행악하는 자, 손할례당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 삼가야 할 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성도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즉 주안에서의 성도의 기쁨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곧 바울이 삼가라고 말하는 그들의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개’라는 용어를 쓰면서까지 삼가야 할 가르침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어떤 가르침이 성도를 위협하는 것이고, 복음에 해를 끼치는 위협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 성도의 기쁨은 주어지는 형편이나 환경에 상관없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는 주안에서의 기쁨과 상관이 없는 것이고, 문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행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의 원칙은 분명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여러분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고, 또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대로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주 안에서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복음의 원칙과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복음의 원칙과 내용을 따라갈 때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손할례당은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인간의 의식적 산물인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은혜가 아닌 인간의 행위를 가르침으로써 몸에 할례 역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할례를 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확실시하는 가르침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할례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할례에 대해서 전혀 의미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까짓 할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겠지만, 현대 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 역시 믿음에 무엇인가를 보태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지 않는 사람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마 지식의 한구석에서는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는 것을 말한다는 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래도 여러분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믿음이 있다면 기도하고 성경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믿음에 뭔가를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우리들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보는 행위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데 일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되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으로 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리스도인된 그로 하여금 날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고백하게 할 뿐이지 우리를 기도하거나 성경보는 사람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 제 마음 한구석에는 저의 말이 기도나 성경보는 것에 대한 무시로 들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는 드리는 말로 이해되었으면 합니다. 이처럼 자칫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것은 교회가 극히 기독교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마치 신자된 기준으로 여기고 있는 기도나 성경보는 것, 또는 십일조 하는 것 등의 행동을 보지 말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가만히 앉아서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즉 믿음이 굳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할례, 성전 예배 등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도 그런 것들은 여전히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로 인해서 할례하지 않은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성전 예배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안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을 위태롭게 하는 위협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빌립보 교회와 똑같은 형태의 거짓된 교훈을 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대로 지금의 기독교에는 할례나 성전 예배를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세례와 예배당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지 말라거나 받을 필요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세례가 믿음의 증거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도 지옥 가는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또한 믿음의 증거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 또한 믿음의 증거물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믿음의 증거물은 믿음이 없이는 보여질 수 없는 열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행위는 버리고 그리스도의 행위에 대해 감사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인식을 한다면 그것은 믿음에 우리의 행위를 보태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아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기도가 있는가 없는가를 봄으로서 믿음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곧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러한 외적인 종교 행위가 확인되어질 때 자신의 믿음에 대해 전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지극히 영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여깁니다. 기도나 성경보는 것들을 영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곧 성령으로 한다는 의미인데, 과연 성령으로 하는 것이 그러한 외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3절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는 말을 합니다.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무슨 특별한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랑 역시 우리가 행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자랑합니다.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의가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행위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행위에 견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어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곧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를 신뢰하지 않음에서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자랑이 나올 수 있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진정한 할례당인 것입니다. 끊어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만 보게 되는 것이야말로 육체로부터 끊어짐을 당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훼방하는 것은 육체를 신뢰하게 하는 것이고 육체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극히 기독교적인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극히 성경적인 행동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이며 성경적인 행동이라는 조건이 신자로 하여금 그 행위에 의미를 두게 하고 신뢰하게 하는 이유로 등장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자를 개, 행악하는 자, 손할례당이라고 표현하는 바울의 심정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원칙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따라가고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복음을 훼방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삼가시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했음을 믿고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곧 할례당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