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기뻐하라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의 신자들에게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신자들에게서 보고 싶어했던 것은 그들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은 슬픔이나 낙심을 이겨내고 기뻐할 수 있도록 힘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슬픔이나 낙심, 또는 기쁨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두는 어떤 조건과 상황에 의해서 나와지게 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큰 슬픈 일이 닥치게 되면 기쁨은 사라지고 슬픔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사람에게 슬퍼하지 말고 예수님 생각하고 기뻐하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것이 말처럼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어지는 일이겠습니까?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옥에 갇힌 바울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고 주 안에서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의 근거는 항상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때문에 ‘주 안에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말을 합니다.



관제란 자신의 희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희생이 드러나고 유명해지는 그런 희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뒤편에서 도와주고 희생되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다 할지라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빌립보 신자들의 믿음을 위해서라는 것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형제의 믿음은 참으로 존귀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바로 형제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 믿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설사 자신이 이름 없이 희생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기쁨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더 소중했던 사람입니다. 형제를 나를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힘썼던 사람입니다. 자신을 섬기기보다도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더 원했던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유혹들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그 믿음으로 승리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실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볼 때, 우리가 어찌 감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믿음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해버리면 다음에는 믿음 가지고 뭘 어떻게 할까? 라는 궁리가 나오게 됩니다. 즉 내 믿음 가지고 믿는 자답게 살아보겠다는 자기 의지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오늘도 겸손하게 믿음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로 하여금 살게 하는 것이고, 신자의 삶은 살게 하시는 믿음에 순종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울에게는 분명 낙심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과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옥에 갇힌 자신으로 인해서 빌립보 신자들을 낙심하게 했고, 또 자신이 옥에 있을 때 기회를 틈타서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을 함으로서 살고 죽는 문제는 자신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말하고, 어떤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해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까 자신은 그것으로 기뻐한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 마음은 바울 자신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그 마음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오직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둘 수 있었고 그 마음이 있었기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은 자신이 잘되는 것으로 인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자식이 잘되는 것으로 인한 기쁨도 아니었고 무슨 돈을 많이 벌어서 주어지는 기쁨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 깊이 두어야 합니다.



바울의 기쁨은 세상의 기쁨, 행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행복과 기쁨을 기대하고 삽니다. 때문에 바울의 말처럼 기뻐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분명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주어져 있는데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쁨을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자이면서도 신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항상 세상을 향한 내 마음에 흡족한 것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들이 자기 마음에 흡족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때 기쁘다, 행복하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기쁨과 슬픔이, 행복과 불행이 자기 마음에 흡족한가 흡족하지 않은가에 의해서 수시로 변동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기쁨은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주 안에서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환경적인 축복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어야 할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은 처음에는 구원받았다는 기쁨이 있었을지 몰라도 그것 역시 얼마 가지를 못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처음에는 구원에 대해서 감격하고 감사하다가 세월이 흐르고 예수를 믿는 삶을 살아가면서 구원이 당연시 되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기쁨이 상실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그것은 신자로서 좀 문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록 주 안에서 기뻐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신앙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고 성령이 오셔야만 하겠습니까?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령이 도우신다는 것을, 나는 가만히 있고 내 마음은 세상 일로 인해서 슬픈데 성령이 내 속에서 슬픔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기쁨으로 채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슬퍼하는 것은 괜히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뻐한다는 것도 괜히 기뻐지는 것이 아니라 기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없이 기뻐하고 웃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정신이상자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분명 환경을 초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환경 때문에 마음대로 안된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과 상관없이 기뻐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에 대한 답을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기뻐하지 못하는 여러분의 삶에 대한 처방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주 안에서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 안에서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뻐하지 못하고 낙심과 슬픔에 머물고 있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 있는 여건을 안주신다고만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모른다는 것이 이미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주어지는 생명을 원하기보다는 세상에서의 축복을 원합니다. 생명에 대한 갈급함보다는 세상의 축복에 더 갈급해하고, 돈만 있다면 생명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분명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시작하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주 안에서의 기쁨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라는 축복의 공간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독교라는 종교의 분위기에서 자라왔거나, 또는 오랜 세월을 교회를 다님으로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 역시 먼저 그리스도인 됨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 됨의 시작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보여지고 맺어지는 모습들이지 무엇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선언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작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사람들은 쉽게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힘을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선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오는 것은 ‘내가 일한다’는 것일 뿐, ‘하나님이 내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내가 일했다’는 자신의 일의 흔적일 뿐이지 하나님이 일하신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것을 다 버리고 시작합니다. 자신의 것은 모두 해로 여기면서 선한 것, 의의 것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과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까? 그럴 자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너무 당연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크신 은혜가 우리 안에서 보잘것없는 것으로 낮춰지는 것이 아닙니까? 마치 물이 귀하다고 하면서도 내 주위에 물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물에 대한 귀함이 우리 안에서 하찮은 것으로 전락 되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게 그 무엇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나아갑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불의한 우리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빈손으로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약 자신이 한 일을 들고 나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종교인으로 시작할 뿐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한 일을 들고 나가는 사람에게는 비록 받은 것이 있다 할지라도 감사함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설령 기쁨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 손에 주어진 것 때문에 기뻐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애당초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나아갔기 때문에 주어진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분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받은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바로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바울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으니 우리 다같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삽시다’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공허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제가 그러한 말을 하면 어떤 분은 ‘누구는 기뻐하고 싶지 않아서 기뻐하지 않는가? 기뻐하려고 해도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할 것이 아닌가?’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정확한 인간의 본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왜 기뻐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왜 기뻐할 수 없습니까? 그 이유의 가장 첫 번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만이 누릴 수 있는 주 안에서의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신을 부족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선도 의도 받을 수 없는 불의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섬김으로 주어진 은혜와 그 의와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마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뻐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우리들이 과연 무엇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따라갑니까 아니면 먹을 것 마실 것을 따라는 삶입니까?



사실 우리의 삶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치우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와 평강 희락 이런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것이기에 우리들 마음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가까운 것은 당장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지 않으니까 어떻게 그리스도로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대해서 마음을 두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먹을 것 마실 것이 풍족하다면 그것으로 기뻐할 뿐이지요.



주 안에서의 기쁨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 때문에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받게 된 의와 거룩, 그리고 생명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리고 받을 자격이 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혜가 주어짐을 알기에 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우리들 스스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가령 예배 분위기를 바꾼다거나. 신나는 찬송을 부른다거나 해서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기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우리 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들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것을 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보다는 세상 것을 얻기를 힘씁니다. 이로 인해서 바울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요즘 연예인들의 마약 사건이 빈번합니다. 연예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짐은 인기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모든 기쁨과 의미를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인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조차도 사라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잠시나마 그러한 짐과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마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기라는 것도 일순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돌아보십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사십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세상 것입니까?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사신다면 여러분에게 주 안에서의 기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주 안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신다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십시오.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하나님에게 나오십시오. 그러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것을 보면서 ‘왜 나는 이것 밖에 없는가?’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 만큼 받고 누릴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의가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멀어져 있던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잠시잠간 동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누리는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먹을 것 마실 것이 더 필요합니까? 돈이 더 필요합니까?



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발견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세상에서 부자로 보여지고 성공한자로 보여지기보다는 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발견되어지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여러분을 풍족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바울의 기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러한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이 나 자신과 상관이 없는 듯한 말씀으로 들려진다면, 그리고 어려운 말씀으로 들려진다면 여러분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해 보십시오.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를 이 말씀으로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