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잃음과 얻음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긍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인이라 선언하실 때,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죄인이 아닌 것 같은데 성경이 죄인이라고 말하니까 그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볼 때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죄인이라 말하는 맹목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죄인이라 선언하시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서 죄인이라는 고백이 나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의 원칙과 표준을 가지고 인간을 평가하십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과 표준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원칙과 표준을 따로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원칙과 표준을 자기의 것과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칙과 표준을 자신에게 유익이 되 는 것과 불이익이 되는 것으로 구분하 여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이고 삶의 표준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하나님의 원칙과 표준이 여러분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다가옵니까? 아니면 뭔가 부담이 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이 살고 싶어하는 여러분의 원칙과 표준에 맞지 않고 오히려 서로 부딪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실제 그렇게 살 마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부담일 수밖에 없고 듣지 않았으면 하는 말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차라리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올해 교회에서 나눠드린 달력에 보면 이사야 55:9절의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는 구절을 적어 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얕은 나의 생각으로 그 뜻을 가리지 말고 하나님의 깊은 뜻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글을 추가해서 적어 놨습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두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가 정한 길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다는 것이 인정되어지는 것은 우리가 정한 길이나 우리의 생각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되지 못하다는 것이 인정되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칙과 표준이 결코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깨달아질 때 하나님의 길과 생각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정한 길과 생각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칙과 표준이 나를 유익되게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칙과 표준은 결코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힘들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도 그 뜻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입에서는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지만 쫓아가는 것은 다른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나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시각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을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바라보느냐에 의해 전혀 다른 결론이 내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바라보신다면(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지만) 무엇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기준으로 해서 바라보신다면 유익이 되는 것에 대한 시각은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원칙과 표준들은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원칙과 표준만이 유익한 것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신자로서 달라진 삶의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이 개, 행악하는 자, 손할례당이라고 표현할 만큼 신자를 유익되게 하지 못하고 신앙의 위험에 빠뜨리는 사상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나 성전 제사등 육체의 것이 믿음에 크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 육체의 것을 신뢰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와 같은 자로 표현했고, 성도에게 악한 일을 행하는 행악하는 자로, 그리고 손으로 한 할례를 신뢰하는 손할례당으로 표현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에서 멀리할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 역시 육체적인 조건으로 따진다면 누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합니다. 5-6절을 보면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는 육체적 조건이었습니다. 이 조건만으로도 바울은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받고 높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으로 나지 아니한 자가 나중에 유대교로 개종을 해서 할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자손이 아닌 이스마엘은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는데 그의 자손들 역시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면 그것은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통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유대교에서는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가르치는 언약적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안에서 ‘이스라엘’사람이라는 것은 또 다른 특권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말합니다. 베냐민 지파라는 것이 왜 자랑거리가 됩니까? 그것은 아마 야곱의 가장 사랑 받은 아들이 베냐민이었으며,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리되면서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사에 대한 규례를 어기고 다른 곳에 제단을 세웠지만 베냐민 지파는 이것을 거부하고 남쪽 유다와 함께 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가문인 다윗의 집에 충성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유대인으로서는 정통 중에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있어서는 가장 철저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율법에 대해서는 흠이 없는 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율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분명 이스라엘 안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들이고, 누구보다 큰소리칠 수 있는 조건들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것보다 더 유익된 조건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을 갖춘 바울은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이러한 육신적 조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7-9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는 이것이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육신적 조건에 대한 바울의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적인 시각에 볼 때는 큰 재산이고 유익된 것이고 자랑거린 육신적 조건을 해가 되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바울에게서 보여진 육신적 조건에 대한 시각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의 변화가 곧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났음을 드러내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세상이 크게 여기는 것들을 가지는 것이 분명 큰 재산입니다. 어느 대학 출신이라는 것, 무슨 공부를 했다는 것, 직장이 어느 회사냐라는 것, 여자로서는 내 남편이 무슨 일을 한다는 것, 이런 하나하나가 세상이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 되는 것이고 의당 자랑거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조건을 갖춘다는 것이 곧 성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이것을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자신에게 유익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조건을 두고 따진다면 자신을 따라올 사람이 없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지 말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처럼 완벽한 조건들이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시각 변화는 무엇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려 함이니’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을 때 바울의 열심은 오직 자신의 의를 위한 것이었고 사람들로부터 ‘믿음이 좋은 자’로 여겨지는 것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 앞에서 자신의 의는 악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천국을 두고볼 때 자신이 쌓은 육신의 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육신의 조건들 역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런 육신의 조건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에게 있었음을 보지 못했고 스스로 교만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들은 오히려 해가 되었을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에 육신의 조건에 매어 있을 때에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다’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알게 되었을 때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만 있었을 뿐입니다.



바울에게 자랑거리였던 육신의 조건들은 그보다 더욱 더 뛰어나고 우월한 조건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노릇한다고 그리스도의 의가 없는 곳에서 인간의 의가 왕노릇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의 의를 보게 되었고 그 의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의로 여겼던 육신의 모든 것이 오히려 해가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의를 두고 생각할 때 자신에게 있던 육신의 조건들이나 의라는 것들은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밖의 모든 것은 다 해가 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리스도를 위해 유익된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바울에게 유익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로 모든 필요한 것들이 채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육신의 조건은 더 이상 유익된 것도, 삶을 위한 필요 조건도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원칙과 표준은 오직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육신의 조건을 하나하나 갖추는 것입니다. 육신의 조건을 갖추는 것을 큰 재산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을 자기에게 유익된 것으로 여깁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원칙과 표준에서 멀어지고 싶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신뢰하고 살아가십니까? 육신의 조건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의입니까? 세상이라는 시각에서 보지 마시고 천국이라는 시각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원칙과 표준들은 오직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유익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말씀을 대한다면 진심으로 우리에게 유익된 것이 무엇이고 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조건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해가 된다고 해서 그것들을 벗어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큰 대기업보다는 작은 회사에 들어가고, 명문 대학보다는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에 들어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든 대학이든 여러분 실력껏 들어가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좋은 직장 좋은 대학이 여러분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는 좋은 조건일 수 있지만, 천국의 시각에서 본다면 전혀 도움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표준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육신의 조건들을 하나님이 과연 인정하시겠습니까? 하나님도 유익된 것으로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좋은 것으로, 나에게 유익된 것으로 여기는 육신의 조건들은 오히려 여러분을 말하는 길로 인도하는 해가 되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육신의 조건들이 신뢰가 되지 않고,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데 오히려 해가 되는 것으로 여겨질 때, 비로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죄없이 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으로 의롭다 선언하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아는 지식과 비교할만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십시오, 바울은 이것을 깨달을 때 다른 모든 것, 즉 육신의 조건들이나 세상을 사는데 유익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은 모두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고상하고, 장차 우리에게 되어질 일들이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고상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육신의 조건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그것들이 고상하다할지라도 지금 나에게는 육신의 유익된 것보다 못하다는 마음이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행하신 고상한 일이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고상함으로 다가올 때 그 고상함은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육신의 유익된 것들을 밀쳐낼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고백은 곧 여러분의 고백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