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  의


사도 바울은 5,6절에서 말하는 대로 육신의 조건으로나 행함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할 만큼 율법을 행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그러한 조건과 행함들이 자신의 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의로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나 존경받을 수 있는 육신의 조건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는 그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였습니까?



9절에서 바울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의에 대한 지식이 달라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기 전의 시각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바울은 율법에 대한 순종과 행함이 곧 의로움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었을 때 의는 율법에 대한 자기 행함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의가 자기 행함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율법을 행하고 지키며 순종했던 자신의 모든 열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행함이나 육신의 조건들은 배설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의라는 말은 성경에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말이고, 또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의며 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의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가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의란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 서게 되었다는 것이 죄인된 우리가 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에 대해서 이것 외에 다른 의미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의를 율법에 대한 자기 행함에 두게 된다면 결국 자기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성경이 증거 하는 바가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9절의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면서도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라는 것 때문에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의를 얻은 자로 사는가 입니다. 그리고 의를 얻었다는 증거는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육신의 조건들이나 자기 행함에 대해서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을 의롭게 여기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가 되는 것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행하는 것이 곧 의로움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율법을 행하면 행할수록 의는 쌓일 것이고, 인간의 자랑으로 굳게 세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온 의에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의에 만족하실 뿐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행함, 즉 자신의 의로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고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악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근거를 상실해 버린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율법을 행해야 그것이 믿음이 있는 증거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율법에 대한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인 율법을 행하는 것이 곧 믿음이고 의로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의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의로 보는 것과 의의 표현으로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의로 본다면 율법을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것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도 역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의의 표현으로 본다면 이는 실천이 아니라 이미 표현된 의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삶을 살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여 드러내라는 용도가 아니라 표현된 의를 기준으로 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바울은 자신을 흠이 없는 자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실천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의를 기뻐하는 것이고 스스로의 의를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하찮은 개념을 지키고 실천하였을 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게 되었을 때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볼 수 없는 것,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 스스로를 높일 뿐이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오히려 인간을 낮아지게 하고 보이지 않던 인간의 죄를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가치있게 보이던 것들이 해로 여겨지고 배설물로 여겨지게 합니다. 수련을 쌓고 고행을 하고 훈련을 하고 도를 닦음으로서 스스로 깨우친 깨달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알아지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율법에 대한 실패입니다. 예전의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 대해 흠이 없을 정도로 잘 실천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의 참된 본질과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외적이며 기계적인 행동의 실천이 아니라 그 마음과 성품까지 포함된 전적인 충성임을 알게 되었을 때, 결국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큰 소리 치던 그가 오히려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스스로의 의를 세우거나 자기 계산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표현되는 행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율법의 실천자는 율법은 자신을 의롭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죄 하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안에서 나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율법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율법은 정죄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율법의 정죄로부터 구해낼 한 의가 오신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행함 안에서 사람들에게 발견되고자 하는 의도를 많이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뭔가 선한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으로 사람들 안에서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으로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해 범죄한 우리 자신에 대해 잊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보여지는 것을 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사람이 보고 평가하는 것은 기계적이고 외적인 행동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보고 그를 평가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볼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 마음을 보고 그를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드러난 행동으로 그 마음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된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결국 왜곡된 판단과 평가를 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할 때는 항상 자신이 기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맞으면 옳은 사람이고 틀리면 옳지 않은 사람으로 결정되어집니다. 때문에 같은 사람의 같은 행동을 두고서도 평가와 판단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기준과, 생각과 마음에 의한 평가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게 좋으면 좋은 사람이고 나쁘면 나쁜 사람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나쁘게 평가한다고 해서 마음 상할 필요가 없고, 좋게 평가한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발견되어지든 그것은 개인의 판단일 뿐이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정확히 보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발견되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한다는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잊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일을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바른 행동을 표준으로 삼고 누군가를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그 표준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당하고 바른 행동에 대한 표준으로 인해서 자신이 정죄 받는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사건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다윗이 집 지붕 위에 있을 때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하여 동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남편이 있었으며, 다윗은 그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해서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합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양을 많이 가진 부자가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 양이 아닌 한 마리 밖에 없었던 가난한 자의 양을 잡아 대접을 하였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화를 내며 ‘이 일을 행한 자를 정녕 죽이리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나단이 ‘왕이 바로 그 사람이요’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것을 약탈했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다윗만이 아니라 여러분이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행동으로 여기며 분노할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오히려 도와줘야 한다는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정녕 옳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과 표준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자가 가난한 자의 것을 약탈한 것에 대해 분노하면서 ‘정녕 죽이겠다’고 소리치는 다윗이 자신 스스로는 약한 자의 아내를 빼앗은 악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의에 대한 바른 표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와 표준에 의해서 자신이 정죄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는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한 의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온전한 의를 주십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자신의 본래 모습 그대로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은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의로운 자로 선언되고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는 신자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나 도덕을 표준으로 해서 누군가를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서는 결코 의가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 어떤 행동에도 의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행동에 의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공하신 의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을 뿐이지 우리 자신의 열심과 행위를 신뢰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의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죄없는 자로 선언되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의를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러분이 인간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은혜로 주시는 의에 참여한 자 되기 위해서 그분을 의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어 있는 자로 태어납니다. 오직 자신에 대한 감각만이 살아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그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지도, 마음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문제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낙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는 것조차 우리의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의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가진 의가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의를 행한 자가 아니라 의를 얻은 자이고 의의 혜택을 입은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의에 대해서 결코 의미를 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모두 신앙에는 해가 되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의를 표준으로 해서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한다면 결국 그 표준으로 여러분 자신이 정죄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자기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