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1  앎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의는 우리가 율법을 행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해서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서 점검하고자 합니다.

신자가 믿음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자기 믿음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 믿음에 대한 의심없는 확신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믿음을 확신하는 대개의 경우 자기 감정에 기초한 극히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즉 믿음에 대해 말씀하는 성경의 객관적 진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종교적 감정에 의한 자기 주관적인 시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만약 우리가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더 이상 자신의 믿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입니다. 때문에 자기 믿음에 대한 자신감에 대해는 극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한다면 기독교만의 것으로 말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종교란 신뢰의 대상이 있기 마련이고 신뢰의 대상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이지 않습니까? 분명 이것이 기독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해당된 이야기라면 ‘믿음은 기독교에만 있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종교가 똑같이 동일한 본질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다만 다른 것은 신뢰하는 대상의 차이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면서도 무엇이 아닌지 스스로도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겨우 끄집어내는 변명 아닌 변명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신이며 참된 신이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된 분이니까 내 믿음이 참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타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종교적 이기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자기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을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되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얘기인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되어지는 유일한 조건인 믿음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린 채 믿음을 주장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의와는 상관이 없는 믿음으로 끝날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 말씀으로 현재 우리는 어떤 믿음에 머물러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신자로서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자신이 믿음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고 그 믿음을 기준으로 자신을 살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신뢰라고 말할 때, 그러한 믿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신뢰는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신뢰와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신뢰입니다.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신뢰는 예를 들어서 다리를 건널 때 ‘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뢰로서 다리를 건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한 어떤 것을 믿고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신뢰는 비록 보이지는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실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천국에 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심리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위에서 말한 믿음은 자기 주관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믿음에 대한 왜곡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자기 주관적인 것도, 자기 감정을 기초로 한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인 반면에 우리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불완전하고 부족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이 곧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불완전하든 부족하든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냥 부족한 대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완전함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느냐의 여부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는 것에 크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입니다. 하나님은 흠이 전혀 없는 완전함에서 만족을 누리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의 그 누구도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생명을 잃어버린 채 사망에 처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분리된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 행동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로 회복이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거룩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고, 완전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치 못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거룩하지 못하고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자각할 때 나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자신의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죄 용서함을 알고 믿게 것으로 믿음의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믿음의 전부라면 우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믿음의 모든 것이 충족되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믿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시작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가신 길까지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알려하여’라는 말을 합니다. 과연 바울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적어도 사도 바울 정도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은 추가로 알아야 할 것이 없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여러분이 지금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말씀에 대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다 아는 말이다라는 태도를 드러내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알려 하여’라는 말을 합니다. 과연 바울이 무엇을 알고자 했던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바울이 ‘알려하여’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다만 그분이 누구인가를 머리에 담아두는 지식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대한 것이란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는 다른 의미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그분을 알아가고 배워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혹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아는 지식에 머물러 있던 차원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즉 삶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맞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믿음이 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판단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음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에게 주어진 믿음은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고자하는 열심으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자신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알게 된 바울이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전부였던 것입니다. 삶의 이유나 의미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삶에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고자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난 예수를 알고 있다’라는 생각에서는 ‘그리스도를 알려 하여’라는 말이 관심 밖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또 다시 알아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믿음이 있는 자의 인생에서는 가장 중심에 위치한 분이 됩니다. 그러한 마음에서는 자연히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에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도 알고자 합니다. 부활과 고난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것인 부활과 고난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추상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것인 부활의 권능과 고난을 자신의 삶에서 배우고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위해서는 바울이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고난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앎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에서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권능은 단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을 이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의 세력에 대해 승리한 것이 곧 부활의 권능이라고 할 때 신자가 삶에서 부활의 권능을 배운다면 그것은 사망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삶을 통해서 배워지는 것이 부활의 권능을 보이셨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난에 참예함으로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환경적인 고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셨을 때 오는 세상의 반응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서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받으셨던 대접을 자기도 받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는 말을 하는 것을 봐도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인해서 죽으신 것처럼, 자기 역시 세상의 그 어떤 세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 것은 자신 역시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사도 바울 자신이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있는 자로 보여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이 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신자 역시 세상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안다는 것으로 족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자로 보여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이며 이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를 깊이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보이는 삶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