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잡기 위해 사는 삶


야고보서 2:17절에 보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26절에서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과 믿음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믿음이 있으면 실천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면 믿음에 의해서 행함이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믿음만 말하지 말고 실천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떠한 믿음이 참 믿음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함을 말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에서 행함만을 보게 되면 본문의 겉만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행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겠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어떤 믿음이 죽은 믿음인가?’를 생각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믿음은 죽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죽었다’로 표현하는 것은 믿음에 생명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살았다’는 말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죽었다 살았다라는 표현은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력이 사라진 상태를 두고 죽은 것으로 말하기 때문에 죽은 믿음은 생명력이 사라진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력이 없는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에 생명력이 없다면 믿음은 스스로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활동을 하지 못할 때, 믿음의 활동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행함이라는 열매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두고 볼 때 우리는 믿음에 대해 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신자에 대해서 답답함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는 믿음에 대해 깊은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이 보일 때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여길 때 저로서는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에 대한 관심이 없이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없으니 자신이 그리스도를 기만하는지, 믿음이 어떠한지도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교회를 출입할 뿐입니다.



고민과 근심이라고 해봐야 세상을 살아가는 일때문이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민이나 근심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나 여러분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무엇이 생각납니까? 하루하루를 돈 때문에 바쁘게 살아가시면서 생각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자로서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신자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명력을 가지고 여러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뭔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먹는 것에 희미하게나마 영향을 끼치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가끔씩이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고민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보는 행동을 함으로써 믿음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이 주어짐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고 살아라’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너희는 이제 내것이다’ ‘이제부터 내 백성이며 나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로 불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천국이나 구원의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즉 천국이나 구원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천국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결국 사도 바울은 천국을 얻고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힘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천국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힘쓰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천국이든 구원이든 이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얻은 것이고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천국을 얻거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야 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두고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읽어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라는 말을 합니다.



우린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애에 두고 살았던 소망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을 아는 것이었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 뒤에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는 소망을 두고 한 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좋은 것만을 골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리스가 죽으신 그 길까지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가신 죽으심의 길을 신자 역시 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할 때,  얻었다는 말도 이루었다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전 생애를 두고 예수님에게 소원을 둔 자로 살아가면서 얻어가고 이루어 가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만하면 다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뭔가 잡기 위해서 좇아간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음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 붙들려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예수님에게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 날도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서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늘에서 들린 음성으로 인해서 예수님에게 붙들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체험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체험을 어떻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든 상관없이 예수님이 여러분을 붙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께 잡혔기 때문에 믿게 된 것으로 이해하십니까?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분 스스로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찾아 나오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부르지 않으시면 우리를 하나님에게 고개를 돌릴 사람들이 아님을 말합니다. 또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해도 그 부르심을 들을 자들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 속에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는 것은 그가 살아있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죽어있는 우리를 생명이 있는 자로 새롭게 살리시고 우리를 부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과 능력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에게 잡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주어짐으로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인생은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를 부르시고 붙드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붙들렸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선택이라고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갈 자로 택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잡힌 바 된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잡힌 바 된 그것’이라는 말을 쉽게 말씀드리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도 바울을 붙잡은 목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된 것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무작정 하신 일이 아닙니다. 뭔가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고,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었고, 그 일에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 부름을 입은 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잡힌 바 된’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붙잡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는 바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자신을 붙잡으신 그 뜻과 목적을 이루기위해서 살아간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전생애를 두고 목적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바울에게는 삶의 의미요 이유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천국이나 들여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택한 자로 하여금 가서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서 하시려는 일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이 관심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항상 보여지는 것은 자기 일에 대한 관심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맺게 하고자 하시는 과실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과실만 생각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바울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진짜 모습은 여러분이 믿는 그 분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붙드신 그분을 좇아가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붙잡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좇아감으로써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된 신자가 맺을 열매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가셨던 그 길을 감으로서 그리스도가 안계신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신자에게서 맺고자 하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그리스도께 붙들린 신자라면 자신을 붙드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택하시고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신 이 모든 일에 감사한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일을 베푸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러한 호의를 받을만한 사람들이 결코 못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신 것이고,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고, 의와는 거리가 먼 자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종결되어 버린다면 과연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을 생각하는가를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28-29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것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역시 부르신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즉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임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보여지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서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사명이요 책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좇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신자로서 우리가 좇아가야 할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시고 신자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