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14  잊어야 할 것


신자로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있음을 마음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결코 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신자를 다스리고 있으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뜻대로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다스림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알았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 것을 좇아가는 삶이 계속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본성으로 살고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기 위한 계속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 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3,14절)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앙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성을 향해서 점차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점진적으로 완성을 이루어 가는 ‘성화’를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성화’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점차적으로 나아져 가는 차원에서의 성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나아진 듯 보이다가도 어떤 상황과 계기가 주어지면 감추어져 있던 우리의 본성이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화’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상실되지 않고 날마다 붙들려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성화는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이 만들어 내는 어떤 열매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께 잡힌 바 된 신자로 살아가는 것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앞서 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기 위한 계속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순되는 말입니까? 제가 말씀드린 노력은 신자답게 되기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두고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소위 신자다운 신자로 여겨질 수 있는 어떤 조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힘쓰는 노력을 의미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할 노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따라가는 것은 결코 자연스럽고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본래의 소원과는 다른 반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옳음을 알기에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참된 신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할 노력이란 신자답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바로 제 뜻이기에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신자로서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평생을 예수님이 자신을 붙잡으신 그 이유를 잡기 위해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붙들린 인생이기에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을 붙드신 예수님의 그 뜻을 좇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마음은 자신을 붙드신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뜨거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열정이며 열심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바울처럼 예수님에게 붙들린 신자로서 우리의 열정과 열심, 그리고 뜨거움은 바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신자로 삼으신 그분의 뜻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망의 자리에 있었고 또 영원히 사망에 있어야 할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존재함을 분명히 받아들인다면 우리를 살리신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고 그분의 뜻을 높이고 그 뜻을 따라 살기를 힘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신자에게 이러한 수고와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바로 이러한 수고와 노력이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아니면 혹 예수님의 뜻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원에 대해서는 냉담한 채 오직 세상을 향한 우리의 뜻에 대해 열심인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우린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을 구원으로만 연결합니다. 즉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작 중요한 것을 잊도록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뭐냐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전부라면, 그리고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열심히 주님을 섬김으로서 나중에 하늘에서 상을 받기 위한 것이 전부라면 결국 믿음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이라면 분명 바울은 이미 잡은 자입니다. 즉 믿음의 목적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내 구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잡고자 하는 것이 ‘자기 구원’이 아닌 다른 것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일에 이미 말씀드린 내용들입니다.



바울은 ‘내 믿음이 이만하면 됐다’는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천국 가기에는 부족함이 없겠다는 ‘자기 계산’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스스로 계산하면서 천국의 여부를 따진다면 그것은 분명 스스로의 애씀으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신자로서 정당한 태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잡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붙잡으신 하나님의 뜻이었지 자기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잡기 위해서 산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완성시키기 위해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몇가지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먼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다음은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위해 좇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이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마치 과거의 일은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잘못된 것이든 잘된 것이든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오직 앞으로의 일, 즉 미래에 대한 것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지만, 신자에게는 과거는 과거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의 머리에 기억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의 머리에 기억되고 잊어버리는 것이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참으로 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기억하고, 마음이 아프고 상처된 일은 지워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기억되기에 기억하는 것이고 잊어지기에 잊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기억하든 잊든 그것은 우리들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때문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는 바울의 말을 우리 스스로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우리와 같은 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과거에 대한 일을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잊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과거의 일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일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담겨 있다면 신자로서 얼마든지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현재에 대해서 교만해지지 않고 또 낙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는 바울의 말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들, 비록 그 사건들이 좋은 것이었든 나쁜 것이었든 상관없이 그 사건 자체들을 잊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나쁜 사건이었다면 과거의 일에 대한 돌이킴을 통해서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과거의 사건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그 은혜로서 현재를 바라볼 때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현재에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생각할 때 겸손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과거는 신자에게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과연 무엇을 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지낼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 불평을 합니다. 민수기 11:5-6절에 보면 그들은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라는 원망을 합니다.



그들은 과거를 생각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고생할 때 과거 애굽에서 먹었던 것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누렸던 것들을 현재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거를 생각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현재보다는 과거에 있었던 것들이 더 좋아 보일 것은 당연한 것이고 결국 그들에게는 원망밖에 남을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도 그러한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현재보다는 과거가 좋았던 기억 말입니다. 그러한 기억에 파묻힐 때 여러분에게 남는 것이 무엇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분명 남게 되는 것은 현재에 대한 불만밖에 없습니다. 현재를 벗어나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에 현재가 싫어질 수밖에 없고 결국 그러한 현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만 남지 않겠습니까?



40대라는 현재에서는 과거 20대의 세월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50대라는 현재에서는 3,40대의 세월에 대한 아쉬움만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6,70대라는 현재에서는 과거에 대한 동경이 더욱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앞의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삶에서 멀어져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잊어버려야 할 뒤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현재의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과거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스라엘은 과거로 인해서 현재에 대해 원망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이라는 복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현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현재를 보지 못한 이유는 과거에 그들이 경험했던 애굽의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로서 잊어야 할 뒤의 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과거에 있었던 경험 자체를 기억에서 잊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잊으라’는 바울의 말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어떤 것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였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경험했던 것들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경험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한 사건에 붙들어 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항상 새로운 사건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변함없는 은혜 안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배운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떤 환경과 상황으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안에 굳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고 살아가는 신자로서 온전한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과거에 경험한 것을 바라보고 갈망하는 것으로 인해서 가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과거에 경험했던 부추와 마늘이 없는 현재의 삶에서 부추와 마늘을 갈망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자신을 깊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것을 갈망하는 것에서 과연 현재에 대한 감사와 만족을 찾아볼 수 있는가를 말입니다. 현재의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는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뒤에 있는 것을 잊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것이며 이것으로 인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러이러한 것이 참 좋았었다’라는 생각에 머무를 때 여러분은 분명 지금의 현실에 대한 불만만 있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노년이 될수록 뒤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노년이 되면 앞에는 바라볼 것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바라볼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쇠약해진 것과 상관없이 하늘의 것이 쇠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바라보는 것도 쇠하여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노년이 될수록 바라보는 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소망이 더욱 분명해지고 확실해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신자의 마음에는 과거에 누렸던 부추와 마늘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있어야 할 것은 부추와 마늘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추와 마늘을 먹게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은 왜 부추와 마늘을 주지 않느냐고 할 것이 아니라 부추와 마늘을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생각한다면 어떤 힘든 일속에서도 주저 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뒤의 것을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간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뒤의 것을 잊는다는 것은 예전의 경험과 환경과 형편 등을 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잊는 것은 예전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여전히 여러분을 인도하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뒤의 것을 잊고 앞의 것을 바라보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앞의 것을 바라보고 좇아간다고 할 때 한가지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푯대’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는 용어로 인해서 바울이 마치 하늘에서 받게 될 상을 기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은 이미 하늘의 모든 것을 얻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었던 바울이기에 자신이 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약속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겼던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상을 얻기 위해서 좇아가는 바울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름의 상’이란 신자가 열심히 함으로써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열매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은 상까지 포함된 부르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했다 못했다와는 전혀 상관없이 약속되어진 상입니다. 그러므로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간다는 것은 상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약속되어 있는 상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보려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하루에서 새로운 일을 겪으며 새로운 교훈을 가르침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뒤에 있는 것에 붙들려 있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새로운 교훈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루를 잘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섬기는 일로 인도해 가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러하신 인도안에서 자신이 원했던 삶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항상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는 삶에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러한 삶에 열심이 있어야 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신자이면서도 편안한 삶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편안한 삶을 위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 마음 두지 마시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좇아서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단으로부터 전혀 괴롭힘을 받지 않을 것이고 신앙 때문에 있을 수밖에 없는 싸움과도 상관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에 두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조심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이 되기 위해 열심일 것입니다.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는 바울의 말은 현재에 머무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좇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의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푯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나아가는 것은 세상이 아닌 하늘을 향해서입니다. 우리가 좇는 것도 세상 것이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입니다. 이 삶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신자에게 마땅한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