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16  그대로 행하라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만 도와주신다면 안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의 길을 인도하셔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원하는 우리들의 길을 인도하셔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마치 우리들의 길을 인도해주기 위해 존재하시기나 한 것처럼 거침없이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창조한 분 앞에서 ‘나를 어디에 어떻게 쓰시려고 지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은 창조주가 자신을 지으신 이유와 목적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피조물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살아감으로서 창조주의 일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일만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보다는자신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며 살아 가는 것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실 뿐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둘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앞으로 자신에게 행하실 일에 마음을 두고 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의 뜻은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누렸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과거에 누렸던 것들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누렸던 것을 잊지 못한다면, 과거의 것을 누리지 못하는 현재에 있어서는 자연히 불만과 원망이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에게 자기 인생을 인도해 달라거나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문을 열어 달라는 기도로 인한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안에서 열려져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여실 것이고, 자신은 하나님이 여시고 인도하시는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순종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역시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비록 원하는 길과 다르다 할지라도 주어진 일에서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행동 역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어려운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속에서 이런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쉽게 명쾌한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많은 신자들이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실 때는 그 어려움이 무엇을 위해서며 어떤 유익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답이 없이 주어집니다. 그 누구도 ‘이 어려움은 언제까지며 이 어려움으로 인해서 어떤 유익을 받게 될 것이며 이러이러한 것을 목적으로 너에게 잠시 어려움이 있게 하겠다’는 명쾌한 답을 받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도 인생에 대한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답을 얻어 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때로 답답하기도 하고 의심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감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답을 조금씩 배우면서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는 말씀처럼 우리들의 인생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인생이라면 나름대로 마음에 여유가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자기 인생의 앞일을 아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결과로 인식함으로써 자연히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면 현재의 일에 대한 결과를 알게 될 것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식으로는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들 보이는 것도 알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결국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답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뿐, 살아가는 것은 자기 뜻이고 자신의 마음대로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인도하시는 것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각에게 주어지는 환경과 형편은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의 삶을 얘기하면서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들도 인도하실 것임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인도하신다는 것만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시는 이유도 그 목적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같은 길로 인도함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도 바울과도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5,16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들 역시 인도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만히 앉아서 연구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본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성경을 본다거나 기도하는 것으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것도 필요하고, 기도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는 생각은 섣불리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뜻은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풀 수 없는 수학문제의 답을 답안지를 봄으로서 금방 알아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배워가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주어졌을 때, 성경보고 기도해서 금방 그 답을 알게 되고, 그리고 그 답을 아는 자로서 주어진 어려운 일들에 대해 신자로서의 명확한 태도와 반응을 보이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있게 하셨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출발해서 삶의 과정 속에서 서서히 조금씩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깨닫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완벽히 파악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뜻을 파악함으로서 인해서 주어진 어려움으로 인한 마음고생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의도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 쉽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5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는 말을 하는 것은, 실제로 온전히 이룬 자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온전히 이루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푯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푯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날마다 계속적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직 온전에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되어진다면, 스스로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는 방법을 쓰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진 것을 바라고 나아가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나 그 믿음의 수준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각각 다른 모습과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대로 나아가고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아서 성경을 보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의미로서의 앎이 아닙니다. 지식과 삶은 분명히 다릅니다. 지식으로는 잘 아는 것들이 삶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지식으로는 유식하면서도 삶에서는 무지함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입술에서는 정확한 말씀이 증거되면서도 삶에서는 말씀이 전혀 증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대한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삶에서 말씀이 없는 무지한 자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든 아는 바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17절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기만 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아닌지를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도 실제 그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자신들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대신 우리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앞세우며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그 뜻을 행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굳이 행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때 자연히 그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알아가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을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함으로써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서 중요한 원리로 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신 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우리 개인의 일에 대해서 묻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어떤 사업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대학을 가야 할 것인지’ ‘어떤 회사를 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대학이나, 직장에 대해서 언급하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을 100번을 읽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0절을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는 말을 합니다. 요한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말합니다. 그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여러분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삶과 모든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연히 믿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며, 그것으로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롤 믿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어려움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더욱 믿고 닮아가는 신자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머리 굴리고 연구하고 공부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두고 살아감으로써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일이 꼬이고 어려움만 온다면 ‘이것이 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든 일이 잘돼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잘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곧 사단의 준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일이 잘되고 안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나 관심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는 여전히 뭔가 답답함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원리일 뿐이지 실제 살아갈 때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직장에서의 회식 자리에 참석해야 할지, 이런 여러 문제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성경은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회식은 하지 말라거나, 친구들과의 모임이라고 해도 술자리는 참석하지 말라든가 이러한 답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목사를 의존하기도 합니다. 목사를 통해서 행동에 대한 규례를 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사가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빌 4:8절에 보면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즉 술자리에 참석했느냐 안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고, 참석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답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고, 우리의 행동이 어떤 생각에 의해서 나와지는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여러분을 행하게 하는 것이고, 그 행함으로 그리스도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다시 마음에 두시고 여러분이 말씀을 얼마나 알든 중요한 것은 아는 바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루하루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이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디로 인도하시는가를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