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나를 본 받으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말하며 살아갑니다. 믿음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며 희생과 섬김을 말하며 삽니다. 하지만 말이 있다고 해서 참된 것은 아닙니다. 우린 때로 말이 있고 생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옳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생각하며, 사랑을 말하고 사랑하는 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고, 믿음을 말하고 믿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안심해 버리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말하고 생각하는 신자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며 생각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말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서 사랑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랑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서는 사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든 희생이든 섬김이든 같습니다. 있는 자에게서 보여지고 증거되는 것이지 없는 자에게서는 자기 것이 보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맞는 말을 하고, 옳은 생각을 하는 것보다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가졌기 때문에 가진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가진 것이 소중하기 때문에 가진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말이 말로 끝나고 생각이 생각으로 그쳐버리는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에 말이 말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과 함께 또 다시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는 ‘그대로 행하라’는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 보면, ‘그대로 행하라’는 바울의 이 말에서 우리는 성경이 성경으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 바울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대로 행하라’는 말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말씀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든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행하는 것, 즉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말이 말로 끝나고 성경이 성경으로 끝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말대로 살아가지 않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옳으며 진리라면 그 말에 순종하고 복종되어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있으되 그대로 행하는 것이 없다면 결국 말은 말로 그쳐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행하라’는 바울의 말은 말이 말로 끝나지 않고, 성경이 성경으로만 끝나지 않으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삶을 끌어가는 능력이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이 말로 끝나 버린다면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능력이며 그냥 듣기만 하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거짓과 불의를 고발하고 그것을 찔러 쪼개는 날카로운 칼로써(히 4:12)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말씀이 말씀되는 것은, 말씀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회개함이 있고 삶의 고침이 있으며, 인간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자기 부인이 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말로 끝나 버리기 때문에 인간의 불의와 거짓이 당당하게 활개를 치면서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크기에 눈길을 돌리게 되고, 교회 재정으로 목사의 능력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한가지는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단지 말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능력으로써 우리 속에 살아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말씀에 이끌려 가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술에는 있으되 그 속에 있지 않는다면, 그는 봉사를 하되 속에서는 다툼과 경쟁과 자기 자랑이 일어날 뿐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다른 사람의 게으름에 대해 비판하게 될 뿐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17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성경이니까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뭔가 예수님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바울답지 않은 말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 때문입니다.



차라리 ‘형제들아 너희는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자’라고 했다면, 아무런 의문 없이 순순히 그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중심이시고 전혀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치고 자신이 높임을 받으려는 의도로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듣고 배운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무능하며 불의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대신할 자가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 쓰이는 도구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귀가 아프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역시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위를 예수님과 같은 위치로 높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진 사람인데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뭔가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한 것입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하면 우린 대개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아 저 사람이 자기의 착한 행동을 본받아서 자기처럼 행동하라고 말하는구나’라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가령 평소에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 ‘나를 본받으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 즉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주는 행동대로 따라하라는 말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착한 행동이 기준이 되어서 그 사람의 행동을 흉내를 내는 것을 본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착한 행동을 하는 다른 아이를 말하면서 ‘제발 너도 본 좀 받아라’는 것은 그 아이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누군가의 행동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그 행동을 따라 똑같이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본받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본받음’은 단지 자신의 착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라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17절의 말을 보면 바울은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이 모두 함께 바울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바울의 착한 행동, 가령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행동을 본받으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한가지 걸림돌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모두 같은 환경과 형편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넉넉하게 살아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해서 남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너희는 함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내 행동을 본받으라’는 말을 한다면, 그 말이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된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말로 끝나는 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함께’라는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특정인들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 병든 자 누구에게도 해당되고 조화를 이루는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함께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드신 분들을 도와주는 행동은 젊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두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픈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 착한 행동이라지만 그것 역시 몸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픈 사람을 돌봐주는 착한 사람의 행동을 말하면서 함께 본받으라고 한다면 건강치 못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분명 바울이 함께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에서 바울이 말하는 본받음의 의미를 알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대로 누구에게나 해당되고 조화되는 행함에 대한 본받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자신에 대한 얘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말한 자신에 대한 얘기는 3장에 등장합니다. 바울은 3장에서 자신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육신적인 조건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러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3:8)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소망은 세상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3:9). 그리고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아니며 날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을 행해서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는 것이었습니다(3:12-14). 이것이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얘기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이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행동을 착한 행동으로 기준하고 그 행동을 본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그리스도를 소원하고 좇아가는 바울의 그 행함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받음은 분명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든 늙은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병들어서 곧 죽을 사람이든, 돈이 많은 사람이든 하루에 두끼를 굶는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소원하고 좇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서 같은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병든 자와 건강한 자에게서 같은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때문에 분명한 것은 개인의 어떤 특정한 행동이 기준이 되어 본받음의 목표로 설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행동을 착한 행동으로 기준하고 그 행동을 따라가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받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받음에 대한 오해이며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가 성도에게 서로 권면할 수 있는 본받음은 모두가 다 함께 행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함으로써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행동을 같이 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요구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살아있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갈 때 보여지는 행함은 육신이 조건은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었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날마다 좇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바울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바울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말씀이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말씀 스스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말씀에 다스려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울은 이런 삶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 함께 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들만이 바울의 삶에 함께 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바울이 원하는 것을 원하면서 살아가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말은 결코 자신의 행위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빌립보의 성도들을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지시 받고 살아갑니다. 그것처럼 다함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지시 받으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말을 합니다. 본받아 사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말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진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곧 사도 바울을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17절 뒤에 보면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나’ 대신 ‘우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디모데(빌 2:19-24)와 에바브로디도(빌 2:25-30)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봐도 바울은 개인의 특정 행동을 본받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나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모두에게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를 지향한 삶을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이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을 행하는 것처럼 빌립보 교회 역시 같은 것을 행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역시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는 사도 바울과 같은 행함이 보여져야 합니다. 바울처럼 얻은 것도 아니요 이룬 것도 아닌 자로서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믿음과 그리스도가 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자로 그리스도를 가진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는 사도 바울과 동일한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보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