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19  십자가의 원수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옳으니까 자기 행동을 본받아 그대로 행동하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의 행동이 곧 의로운 것이고, 따라서 그 행동을 그대로 본받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생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행동은 바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행동은 바울이 아닌 성령으로 인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바울을 간섭하기 때문에 바울의 마음도 의지도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고 그러한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행동만을 볼 것이 아니라 바울을 그렇게 만드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이 나를 바울처럼 다스려주기를 소원하게 되고 그 일을 두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곧 신자의 옳은 자세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의 행동을 본받고 자기 역시 그대로 행동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성령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의의 행동을 만들어 내려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물론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행동에서 도전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그를 내세워서 나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떤 마음 자세가 그와는 다른 행동으로 살아가게 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행동이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마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나를 본받으라’는 말 역시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그 마음을 본받으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처럼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께 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스스로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외친 사도 바울은 이어서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18절)는 말을 합니다. 오늘은 바울의 이 말에서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이 말을 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을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 안에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 실상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음 아픈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이라면 이것은 지금의 은석교회와 무관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즉 은석교회 역시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그 말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을 듣기에 기분 나쁘다는 식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된 우리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말씀이며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 스스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하나 실상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게서 십자가의 원수된 모습이 발견되어진다면 속히 그러한 모습에서 돌이키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라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내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보다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내세워서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계속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침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의 말씀을 참으로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교회를 잘 다니고 있고,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예수를 믿고 있으니까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빌립보 교회의 그 여러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십자가의 원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진심으로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제하고는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많은 봉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를 교회 안에서 찾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교회 밖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가 하는 일을 훼방하는 이방인들 아니면 타종교의 사람들을 두고 십자가의 원수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혹 교회 안에서 목사를 핍박하거나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두고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훼방하거나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사람을 두고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원수 역시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성도로 여기던 사람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말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히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로 여기고 그냥 지나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사람의 말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럼으로 인해서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임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결국 그것으로 끝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원수가 과연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살펴보고 우리 자신이 그러한 모습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9절에 보면 바울은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즉 지금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이 멸망이 아니라 십자가의 원수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사는 것의 마침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신은 배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의 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는 삶에 사로 잡혀서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세상 것을 필요로 할 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필요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말하되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킬 세상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하고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수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귀한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시는 것을 오히려 선한 것으로 말하고 선하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악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땅의 일은 곧 나의 일이고, 나의 계획과 소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반면에 하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신자라면 당연히 그 마음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일을 생각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은 외면당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증거물인 십자가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의 풍토는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말하되 십자가에서는 멀리 떨어지기를 원하고, 천국을 말하되 천국의 삶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편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의 풍토를 그대로 따라감으로서 자연히 하나님보다는 자기 욕망, 하늘의 보다는 땅의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도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도덕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수준 높은 자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교회들이 산상수훈에서 기독교 윤리를 말하기를 좋아하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분의 죽음을 따라가는 삶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기뻐하는가는 그의 삶이 말을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음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믿음을 말하면서 그 말과는 전혀 모순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믿음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만으로 자신에 대해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작 우리의 행동은 말과는 전혀 반대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음을 믿는다면,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이 내 자신으로 인한 죽으심이며 희생임을 믿는다면, 과연 죄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모순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모순적인 신앙은 결국 상상속의 신앙일 뿐이며 그러한 신앙은 결코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죽음의 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죽음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심령이며, 이것을 두고 제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자신이 곧 죄인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이 상한 심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한 심령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귀한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원수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된 존재임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의로운 행위와 노력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십자가의 의미에 대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으로 의를 얻었으며, 그 의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음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인간의 행위와 노력에 대해 의의 의미를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를 밟아 버리고 자신의 행위로서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나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스스로 활동 할 수 없고, 스스로 의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결코 성경에 대한 교리나 이론으로 그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정신이 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그리스도보다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말하되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의 하나님은 그의 배가되는 것이고, 그가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몸이 성공하는 것이고 존귀하게 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땅에 속해 있는 몸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의 욕망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욕망 자체가 악한 것임을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스스로 자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욕망 자체를 주님 앞에 말할 수 없는 악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 역시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한다면 그것이 곧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는 신자라면 자기 욕망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욕망이 곧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욕망에 대해서 싸우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심지어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 소위 소박한 욕심이라고 하면서 자기 욕망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뻐하지 않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도 대신 그 자리에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예수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신자는 ‘그리스도만 계시면 된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 α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자기 욕망이 하나님으로 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십자가가 생명이며 모든 것입니다. 십자가를 알고 믿는 것으로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자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 역시 십자가로 교회다움의 모습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외면하고 외적인 것으로서 교회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교회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로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든 예수든 모두가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켜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있다면 바로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