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21  기다리는 신앙


히브리서 11:1-3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이 믿음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라는 말을 합니다. 그 한 예로써 우리가 비록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그 사실을 분명히 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지 못한 것을 마치 본 것처럼 확신하고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것을 우리의 눈으로 목격하고 확인해서 아는 것이라면 믿음은 분명 불필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 또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되어질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고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일 을 아는 것에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또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장래의 일에 대해서 알게 하는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일이나, 지금 현재 나타난 세상 일에 대해 도움을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일에 대한 신념이나 의지, 또는 희망을 갖게 하는 역할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일이나 장래 나타날 일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단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내용들을 읽고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보지 못한 우리나라의 옛 역사에 대해서 역사책을 읽고 들어서 알고 있는 수준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알게 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에게 되어진 일과 되어질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사실로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인해서 되어진 일, 즉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의를 얻었음을 믿는 것이요, 나아가서 되어질 일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 자로서 영광된 몸으로 변화되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증거를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곧 실상이고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실로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소망까지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확실하고 확고하기에 눈에 보인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그러한 믿음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20-21절)고 말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현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지고 되어질 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되어진 일과 되어질 일에 대해 증거요 소망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굳건한 소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본문에서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로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단지 고상하고 이상적인 삶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윤리와 도덕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칭찬 듣고 살아가는 인격적인 삶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자라고 말하면서 장차 그 몸이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자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그 신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과 위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이것은 장차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으로 끝나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교회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있음을 경고하면서 신자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시민다운 삶이 되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신분에 맞는 삶이 보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로서의 위치와 그 신분에 대해서 망각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한다면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삶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삶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이 희미하기 때문에, 아예 영광된 하늘나라가 그 믿음에서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산다거나 신자다운 삶을 살기 위한 애씀은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다’라고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현재 우리의 참된 신분은 이 땅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이 잠시 세상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0:19절을 보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애굽 땅에서 애굽의 종으로 존재했습니다. 이 시절을 모세는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 받을 약속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명히 이루실 것이고,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거할 땅은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 분명합니다. 비록 현재 몸은 애굽에 거한다고 해도, 장차 그들이 영원히 거할 땅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애굽에 거한 시절을 나그네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역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현재적인 나라는 단지 잠시 머무는 곳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땅의 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결과라고 단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늘에서의 신분과 땅에서의 신분 등에 대해서 생각지 않기 때문에 단지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일에 대해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단순히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스스로 그러한 신자의 삶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신자에게만 주어진 신분과 귀한 가치를 신자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버리고 세상과 똑같이 땅의 일에 파묻혀 살아가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모습들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신자가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라는 것에 대해서 에베소서 2:4-6절에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하고 골로새서 1:13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사실 극히 현실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알게 되고 이해되고 믿어지는 하늘의 비밀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하늘의 일이지만 또한 신자라면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사고방식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해서 어떤 봉사를 하고 공로가 있기 때문에 시민으로 삼아준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출생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로 지음 받고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하늘에 시민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신자의 신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있는 신자와 믿음이 없는 신자 아닌 자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신자라 하면서도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을 한 사도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회의 참된 성도들에게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지음 받고 태어난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같은 삶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추구하는 것 자체가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신자로서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을 잃어버리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과 같은 수준의 삶에 머물러 버리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세상에서의 삶이 유일한 것이 아니며 전부가 아닙니다. 신자는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가지만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대로 신자의 삶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즉 재림은 단지 성경적 교리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현실이 되어야 하고 그 심령속에 살아있는 산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그의 삶에 사실로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만일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면 이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에서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삶의 모습들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믿음은 신자에게 삶의 기준과 목표와 가치관 등을 바꿔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믿음은 삶의 기준을 예수님에게 두게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심판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삶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은 신자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자가 사람을 대할 때 그가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 귀찮은 사람인가? 등등으로 구분을 하고 대한다면 과연 그러한 모습이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구분은 분명 잘못된 것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분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이 사람에 대한 구분을 하고 산다면 그것은 분명 예수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 자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분명 멸망으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산다면 그 믿음에 의해서 혹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은 아닌가 살피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히 그 삶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예수님을 기다린다’라는 생각이 있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과연 그 기다림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점검하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투기를 습관화하며 모든 형제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 대하지를 못하고,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로 구원 얻은 자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들의 공로를 자랑하게 되며 그 공로로 차별화를 가져오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경쟁하고 분열하며 배려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예수님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일서 3:2-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막연하게 ‘오시면 좋겠다’는 바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영광에 참여하게 되어질 소망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으로 산다면 그는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케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깨끗하심, 거룩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 그분의 깨끗함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믿음은 신자의 삶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을 알고 믿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삶이 전혀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자로서의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오심은 믿음이 아니라 다만 기독교의 교리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자신을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먼 길을 떠난 주인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종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주인이 다시 오실 것을 생각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 삶을 산다면 종의 삶은 주인의 의도는 무시한 채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 우리가 그 어리석은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며 소망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