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영광된 몸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자식이라 할 것이고, 드물겠지만 사랑하는 아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룩해 놓은 자신의 사업이라고도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식일까요? 아니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내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입니까? 분명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능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미 그 시작부터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따로 있는데, 정작 신자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그분을 우리 역시 소중히 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 있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것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기 전에 소중히 여기던 것과 신앙이 있게 된 후에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요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말한 후에도 여전히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대상이 달라짐이 없다면 믿음 자체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따로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예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따로 있다면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나 믿음은 나를 위해서 이용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소중한 분으로 자리한다면 자연히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라면 곧 믿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제가 그 믿음을 여러분에게 집어넣어 줄 수도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물론 제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여러분 모두에게 신실한 믿음을 집어넣어서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저 역시 하나님께 구할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누구냐?’라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성경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할 뿐이고 나머지는 성령의 역사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배우게 되고, 세상을 사시면서 잊어버리고 소홀히 했던 예수님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곧 말씀이 여러분에게 함께 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결과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소중한 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것을 본문 21절의 말씀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21절의 말씀은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죽은 후에 되어질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마침 오늘이 기독교가 정한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에 부활에 대한 말씀을 대하면서 부활과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해마다 부활절만 되면 제가 시비를 걸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하고 부활을 소망한다고 하는데 진심으로 부활을 소망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활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을 무시하거나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쉽게 부활을 말하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오늘 역시도 저는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활을 말하지만 진심으로 부활을 좋아하고 소망하는 신자로 살아가십니까?’ 이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을 단순히 ‘다시 산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몸이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케 된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부활을 변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변함은 만화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로봇이 변신하는 차원의 변함이 아닙니다. 즉 외모와 형태의 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변함은 낮은 몸에서 영광의 몸으로 바뀌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외모나 형태의 바뀜이 아니라 몸의 질적인 바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이런 이해로 인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죽을 때의 육신 그대로 부활하는가?’라는 의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이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면 어린아이로 죽으면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늙은이의 모습으로 죽으면 다시 늙은이로 부활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이상이 있는 채 죽었다면 여전히 그 모습으로 부활하고, 세상에서 못생긴 모습으로 태어나 죽었다면 다시 못생긴 모습 그대로 부활하는가?



덧붙여 생각한다면 요즘에는 성형 수술이 유행이라고 하는데 성형 수술을 한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면 성형 전의 모습으로 부활하느냐 아니면 성형 후의 모습으로 부활하느냐? 라는 의문도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한가지 더 재미있는 생각을 해본다면 소위 성전환 수술을 한 모 연예인 같은 사람은 남자로 부활하는가 아니면 여자로 부활하는가? 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쓸데없는 호기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몸은 그 누구의 몸이라 할지라도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하에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몸은 누구나 동일하게 낮은 몸이라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몸에 대한 이러한 비밀을 모른 채 자기 몸을 자랑하고 뽐내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을 자랑하고 몸 때문에 낙심하고 실망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부활의 비밀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5-3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 역시도 사람이 어떤 몸으로 오는가에 대한 의문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육신이 곧 장래 다시 사는 변화된 몸이 아님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42-44절에서도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에서의 몸과 다시 사는 몸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말씀 앞에서도 우리의 관심은 다시 살 영광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욕되고 약하고 썩어질 육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의 몸으로 사는 것보다도 썩어질 육신으로 사는 것에 더 소중함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썩어질 육신에 대한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더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해서 예수님은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 놓고 앞으로 살아갈 육신의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부자를 언급하면서 ‘어리석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육신의 삶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창고에 쌓아둔 곡식으로 인해서 누릴 육신의 쾌락으로 기뻐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나 우리는 동일한 인간입니다. 똑같이 흙으로 지음 받았고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고, 인생의 끝남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주권이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곧 어리석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그 어떤 육신의 즐거움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는 사망에 갇힌 자로 살아갑니다. 육신의 즐거움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며 잠시 잠간일 뿐입니다. 몸을 자랑한다고 해도 사망에 갇힌 썩어질 몸을 자랑하는 것 뿐이요, 세상 것으로 누리는 삶을 자랑한다고 해도 역시 사망이 갇힌 삶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보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사망에 갇힌 육신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세상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믿음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낮은 몸’은 땅에 속한 몸을 뜻합니다. 흙으로 돌아갈 몸이며 썩어질 몸입니다. 사망에 갇힌 몸입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들의 몸이며 지금 우리 자신이 입고 있는 몸의 실체입니다. 이 몸을 예수님이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고 합니다. 이 영광의 몸은 사망에 갇힌 자의 몸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늘에 앉으신 분의 몸을 말합니다.



우리의 썩어질 몸을 입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바꾸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에게 약속되어 있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썩어질 자신의 몸을 생각하는데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늘나라에 거할 수 있는 영광의 몸을 입게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예수님이 소중한 분으로 그 속에 자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서 거하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해 하찮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으심 부활보다도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아갈 자신의 삶이 더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보다도 내 수중에 돈이 한푼 더 들어오는 것이 기쁘고, 예수님과 같은 영광된 몸으로 영원토록 하늘에 거하게 된다는 그것보다도 돈이 더 소망이 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소중한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깨끗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그분을 따라 우리 역시 영광된 몸을 입을 자가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나 사도들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라고 해서 믿음에 유리할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을 했다 하더라도 성령이 아니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목격을 하고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들은 사도들이 만난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고, 성령으로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분은 분명 자신보다 더 소중한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이 바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로 주어진 것임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생각한다면 낮은 몸으로 사는 인생은 절대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변케 될 영광의 몸은 천국의 삶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에서는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분은 우리에게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생각한다면 영광의 몸이든 예수님의 부활이든 그 모든 것은 가치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에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세상에서 낮은 몸을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은 돈이며 권력이며 명예입니다. 세상은 그것으로 영광된 몸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세상이 부활이니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느니 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오직 낮은 몸이 세상으로부터 가치있고 영광된 몸으로 인정받고자 힘쓰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몸이 소중할 뿐이며 그 몸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만이 최고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을 말한다면 과연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둔 자로서 부활을 말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소망한다면 바울의 말처럼 낮은 몸이 예수님과 같은 영광된 몸으로 변케 된다는 그 말씀이 큰 소망으로 자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육신을 소망하거나, 남들보다 적은 것으로 낙심하는 것은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부활된 자로, 영광된 몸으로 하늘에 앉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광된 몸이라는 것은, 외형적으로 영광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된 몸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외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변한 몸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몸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가령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는 것은 해가 필요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몸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우리 몸이 예수님처럼 얼굴이 빛나고 광채가 번쩍이는 변하는 것을 영광된 몸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얼굴이 빛난다고 해서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영광은 세상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에 계시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심으로써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사망에 갇힌 낮은 몸으로 사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늘에 거하게 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평민이 청와대를 가고 대통령과 악수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바로 그 영광의 나라에 거하게 되는 자가 된다는 것이 영광된 몸으로 변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단지 성경의 내용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낮은 몸일 뿐입니다. 소망이 없고 죽음으로 끝날 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몸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하늘에 거할 영광된 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중한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