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주 안에 서라


바울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이 ‘주 안에’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안에’라는 말은 여러분에게는 매우 귀에 익은 말이고 또 친숙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처럼 귀에 익고 친숙하며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주 안에’라는 말의 뚜렷하고 분명한 중심된 것을 붙들지 못하고 다만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역시도 ‘주 안에’라는 말에 대해서 잘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주 안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평소 여러분들이 ‘주 안에’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고, 또 주 안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렇게 사는 것을 고민하고 힘쓰는 삶이 있었다면 결코 어렵지 않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많이 들었던 말이기에 ‘알고 있다’는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는 매우 곤란할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도 ‘주 안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이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굳게 서서 살아라고 권면 하는구나. 그래 주  안에서 굳게 서서 살아가야지’ 누구나 쉽게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만으로는 ‘주 안에 서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가야지’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또 진심으로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주 안에서 곧게 서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막연한 상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주 안에 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주 안에 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주 안에’라는 말을 주의 일을 하며 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주 안에 사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주 안에 있기에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역시 또 등장하는 문제점은 ‘주의 일’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종교적인 행위로 집중됩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금하는 것 등등이 주와 연관된 것이고,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곧 주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에서 결론 내려지는 ‘주 안에’는 앞서 열거한 소위 주의 일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주 안에 서라’는 말 역시 앞서 말한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 안에서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을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을 열심히 보고 구제와 봉사 충성 등에도 열심을 내며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문제를 자신의 행위와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의 문제가 주님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심과 연관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믿게 된 것은 주님의 능력이고,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날마다의 삶 역시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주 안에 서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을 이해하면 신자가 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도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주 안에’라는 말은 어떤 영역을 의미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주 안에서 산다’라고 할 때 이 말은 그 삶의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는 삶이 있다면 반대로 주 밖에서 사는 삶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삶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은, 신자들 가운데 주 안에서 사는 자와 그렇지 못한다는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이기에 그 삶의 영역이 주님이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이것을 보면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말이 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것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것은 우리의 낮은 몸이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케 되는 부활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하늘로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말도 합니다. 이것과 주 안에 서라는 말이 연관이 있음을 ‘그러므로’라는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하늘로 가시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 몸과 같이 우리의 몸이 변케 된다는 것, 이러한 내용들은 단순한 기독교의 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 이러한 내용들이 단순한 교리적인 차원에서 암기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기독교는 잎이 무성하고 열매는 전혀 없는 나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저주로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장차 하늘의 시민이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하늘의 시민임을 말합니다. 이처럼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말하는 것은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의 시민이라는 특권을 지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나 부활 역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재림이나 부활은 주 안에서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아가고 또 영광된 몸으로 부활할 자 답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주 안에서 되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세우는 자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하기를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은 삶의 영역이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삶의 영역이라는 것은, 주님이 하신 일과 주님으로 되어진 일 그리고 주님으로 되어질 일 위에서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을 점령 했습니다. 점령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점령하신 땅을 단지 그들이 차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있던 이방인들과 싸워서 그들을 진멸해야 했던 일도, 아직 얻지 못한 땅을 얻기 위해서 싸우라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점령하시고 차지하신 땅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점령한 땅에서 그들이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은혜로 점령하게 된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감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게 된 약속의 땅, 곧 은혜의 땅에서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키는 것인데 이것은 은혜를 입은 자다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자를 일컫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어졌습니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루어야 하고 보충해야 할 일이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것을 지키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주 안에’라는 말에는 주님으로 되어진 일이 있고, 또 주님으로 되어질 일도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주님으로 되어진 일을 믿으며 주님으로 되어질 일을 소망하고 산다면 그것이 곧 주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가령 주님으로 되어진 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고 깨끗한 자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주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 안에서 산다면 그 삶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주님의 죽으심으로 깨끗함을 얻었다는 주님의 일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마치 공로가 되어지는 것처럼 자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로 의로 여김 받은 주님의 일 위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주 안에서 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 서라’는 말도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교회와 연관된 어떤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나, 기독교적 행위라고 여겨지는 일에 힘쓰는 것 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안에’를 주님이 이루신 일과 주님이 우리에게 이루어 주실 일로 이해한다면 결국 ‘주 안에 서라’는 말은 주님의 모든 일 위에 서서 살아가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삶에서 모든 행동의 근거가 주님의 일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2절에서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주님으로 되어진 일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깨끗함을 입은 그 일 위에 살아가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를 자랑하게 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되어진 은혜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육체를 신뢰했다면, 즉 할례라고 하는 의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의로 여겼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의 죽으심이라는 은혜를 굳게 세우는 삶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 서 있다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신다면 주 안에 서 있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안에 서라는 바울의 말은 주님의 일을 굳게 세우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의 삶에서 되어질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이라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신자의 싸움은 승리를 얻어내고 무엇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싸움을 마치 사탄과 싸워서 승리하기 위한 싸움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분이 이미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이라는 사탄의 권세에 대해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일 위에서 살아가는 신자는 사탄에 대해 승리하신 주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사탄에게 승리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를 지키고 굳게 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의 싸움은 예수님의 싸움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를 위한 싸움이었지만 신자는 이미 승리한 것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다 이루신 일안에서 사는 것과 자신이 또 다른 의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의안에서 사는 것은 주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의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은 자기 의안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3:9절에서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구원은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신자가 가진 의는 율법, 즉 자기 행함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곧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같은 죄로 두 번 처벌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 103:12절에 보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의에 굳게 서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의를 굳게 세우라는 것이지 우리가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우리가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거나 하나님의 눈에 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내가 착한 행동을 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열심히 봉사하면 하나님의 눈에 들겠지’라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서신에 보면 사도 바울이 ‘행하라’는 말을 합니다. 빌 4:9절에서도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행할 것을 요구하는 말이기보다는 주 안에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5:8절에서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에서도 바울은 행할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어두움에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굳게 세우라는 뜻으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주 안에 서라’는 말은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역시 신자로써 모범적인 삶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는 교범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주 안에’ 있는 자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주 안에’라는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하고 주님으로 이루어진 의와 은혜를 굳게 세우는 자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신자는 에수님이 이미 이루시고 승리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은혜의 터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은혜의 터 위에서 신자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이루신 은혜를 굳게 세우는 것이 최상의 일입니다. 그것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속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예수님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주 안에 서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선다는 것은 막연한 것도 다만 신자 개인이 가지는 느낌도 아닙니다. 삶의 구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터로 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싸움입니다.